우리은행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판매사들 중 처음으로 자율 배상을 실시한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4월 만기 도래 시 손실이 예상되는 투자자에게 배상 절차 등을 안내하고 1:1 협의에 나선다. 당초 금융권에서는 ‘금융사가 자율 배상을 결정할 경우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우리은행은 법률 검토를 통해 ‘배임 가능성이 낮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은행이 자율 배상 ‘첫 스타트’를 끊으면서 먼저 나서기를 주저하던 다른 은행들도 배상 논의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전날 오후 서울 중구 본점에서 이사회를 열고 금융감독원의 분쟁 조정 기준안을 수용해 홍콩H지수 ELS 투자자에 대한 자율 조정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내달 12일 첫 만기 도래 후 손실이 예상되는 투자자들과 미리 접촉해 배상 절차 등 자율 조정 내용을 안내하고 본격 조정 절차에 돌입할 계획이다. 투자자의 동의만 있다면 1주일 이내로 배상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기대를 모았던 배상 비율은 공개되지 않았다. 투자자별 고려 요소가 다양한 데다 개별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일률적인 수치를 산출하기 어렵다는 게 우리은행 입장이다. 다만, 우리은행 관계자는 “배상 비율이 20~60%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배상 규모는 최대 100억 원가량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의 자율 조정 대상 ELS 금액은 415억 원 수준이며 가입자는 450여 명이다. 현재 홍콩H지수는 5700 정도로 3년 전인 2021년 4월 초(1만 1000)보다 48% 정도 낮은 상황이다. 단순히 계산하더라도 투자자들은 투자금 절반가량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우리은행이 예상하는 20~60%의 배상 비율을 고려한다면 대체로 투자자들은 투자금의 10~30% 정도를 배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은행이 선제 배상 결정을 내린 것은 배임 소지가 없다는 법률 검토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대형 로펌 3곳에 법률 검토를 의뢰했는데 모든 로펌이 배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앞서 금융권에서는 판매사가 선제적으로 배상에 나서는 것은 암묵적으로 불완전판매를 인정하는 셈이 돼 주주들이 배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배상을 진행해도 합리적인 경영 판단으로 허용되는 재량 범위 안에 있다는 법률 검토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들의 배상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이 자율 배상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이후 다른 은행들도 속속 이사회 논의 일정을 발표 중이다. 과징금 등 금융 당국의 제재 압박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은행은 이달 27일, 농협은행과 SC제일은행은 28일 각각 이사회에서 관련 사항을 논의할 계획이다. 판매액이 가장 많은 KB국민은행은 현재 판매된 ELS 상품에 대해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추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상 절차를 논의할 계획이다. 두 번째로 판매액이 많은 신한은행도 아직 이사회 개최일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다만 은행들이 배상을 결정하더라도 실제 배상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들이 판매한 ELS 계좌만 24만 개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투자자들과 개별 협의를 통해 배상 비율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자자와의 협의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아 분쟁조정위원회나 소송까지 가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ELS 판매 규모와 만기 시점도 제각각인 만큼 은행별 배상 속도에도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인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과거 불완전판매 사태와 비교해 판매액이 상당히 많은 만큼 개별 배상률을 조정·합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만기 시점에 따라서도 배상 시점이 달라지므로 올해 말 만기가 도래해 손실이 확정되는 투자자의 경우 최소 내년에야 배상 절차가 진행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