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은 오는 2030년까지 총 7조8000억 원을 들여 미니 이지스함(6000t급) 6척을 건조하는 사업이다. 방위사업청은 올해 후반기 중에 입찰 공고를 낼 예정이다. 이 사업을 두고 군함 시장에 양대 산맥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수주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양산을 위한 ‘상세설계’와 초도함 건조 사업이 기존 관례대로 ‘기본설계’를 수행한 HD현대중공업이 맡을지, 한화오션이 참가하는 경쟁 체제가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첫번째 승기는 한화오션이 잡았다. HD현대중공업 직원들은 KDDX 사업 등과 관련한 군사기밀을 몰래 취득해 회사 내부망을 통해 공유해 군사기밀보호법을 위반한 혐의로 작년 11월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방사청은 2025년 11월까지의 군함 입찰에서 HD현대중공업에 보안 감점 1.8점을 주는 징계를 내렸다. 별도로 HD현대중공업의 KDDX 입찰 제한 여부를 판단하는 부정당업자 처분 관련 계약심의위원회도 열기로 했고 지난 2월 27일 열렸다.
HD현대중공업은 이미 군사기밀 유출 사고로 방사청 입찰 때 보안 감점을 받고 있는데, 입찰참가 제한 제재를 받으면 최대 5년간 해군 군함 사업에 대해 입찰 참가가 제한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계약심의위원회는 이 날 7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를 거쳐 진통 끝에 최종 판단을 내놓았. 저녁 8시 방사청은 출입기자단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공지를 통해 “계약심의회에서 한국형 구축함(KDDX) 사업과 관련한 HD현대중공업의 부정당업체 제재 심의를 ‘행정지도’를 의결했다”고 공지했다.
방사청은 이 같은 결정 배경에 대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이 국가계약법 제27조 1항 1호 및 4호 상 계약이행시 설계서와 다른 부정시공, 금전적 손해 발생 등 부정한 행위에 해당되지 않으며 제척기간을 경과함에 따라 제재 처분할 수 없다고 봤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방위사업법 59조에 따른 제재는 청렴서약 위반의 전제가 되는 대표나 임원의 개입이 객관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아 제재 처분할 수 없다고 봤다”고 덧붙였다.
방사청 관계쟈는 “지난해 2월에 심의했지만 추가로 검토할 사항들이 있어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한 보완과 검증을 거쳐 이날 마라톤 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사업 입참참가 제한 처분이 필요없다는 결정을 도출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에 열린 계약심의회에서도 HD현대중공업의 입찰참가 제한 안건을 심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해 논란이 일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HD현대중공은 제재를 받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들 두고 방산업계에서는 KDDX 사업 수주 경쟁 ‘1라운드’에서 HD현대중공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대해 한화오션은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이 입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고발했다. 한화오션은 “임원급 이상의 지시 없이 직원들이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서버에 저장까지 했다는 건 어불성설로 HD현대중공업이 방사청의 제재를 부당하게 피해 갔다”고 반박했다.
이어 “HD현대중공업 임원이 군사기밀 유출 사건에 개입한 사실을 수사해 처벌해달라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고발한 사건이 지난 3월 6일 오후 본청 중대범죄수사과에서 담당하기로 했다고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수본 중대범죄수사과에서 해당 사건을 담당한다는 것은 경찰이 사안을 중요하게 본다는 의미다. 중대범죄수사과는 권력형 비리와 대형 경제범죄를 직접 수사하는 부서로, 주요 특수사건 수사를 담당해 온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전신으로 지난 2019년 명칭을 바꿨다.
한화오션이 형사고발에 이르게 된 배경은 계약심의위의 결정 판단 근거와 자료가 부실했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방사청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관련 법원의 판결문만 가지고 현대중공업의 대표 또는 임원이 이 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국방부검찰단의 사건기록에 따르면 유죄 확정 현대중공업 직원 9명 중 1명인 A씨는 군사기밀을 불법취득한 사실을 보고한 보고서에 임원(중역)이 결재한 정황이 담긴 진술이 포함돼 있다.
검찰단도 A씨에 대해 “군 실무자로부터 군사비밀을 제공받아 열람 후 불법으로 촬영해 탐지·수집했으며 이를 국내출장 복명서를 통해 열람한 사실을 보고했고, 이를 피의자와 부서장 및 중역이 결재한 게 맞느냐는 물음에 예라고 답했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방사청은 국방부검찰단과 울산지검 등 수사기관의 사건기록은 구하지 않은 채 이번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기밀 유출을 개인의 행동으로 치부해버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진행으로 해당업체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한화오션은 직접 경찰청에 수사를 의뢰하는 고발을 했다.
한화오션이 법적 판단과 언론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사이 HD현대중공업은 방사청을 물밑 작업에 나서며반격에 나섰다. KDDX 기본설계를 수행한 HD현대중공업이 방산물자 지정을 신청했다. 이에 방사청은 지난 3월 14일 방산물자 지정 요건을 확인하기 위한 현장 실사를 진행했다. 방산물자 지정 제도는 무기체계로 분류된 물자 중 안정적인 조달원 확보와 엄격한 품질보증이 필요한 물자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방사청이 지난 3월 21일에는 사업관리분과위원회를 열어 HD현대중공업이 신청한 KDDX 방산물자 지정 안건을 심의했다. 현재는 안건 심의 결과의 방위사업청장 보고 등 내부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르면 이번 주 중 그 결과가 HD현대중공업에 통보될 예정이다. 방산물자 지정은 무기체계로 분류된 물자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품질보증을 엄격히 하기 위한 절차다.
KDDX는 연구개발 중 신속한 전력화를 위해 미리 양산을 허가받는 ‘잠정 전투용 적합’ 판정도 획득했다. KDDX가 방산물자로 지정되면 국가계약법상 수의계약 대상이 된다.
방위사업관리규정은 ‘기본설계 주관기관이 계속하여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위원회 또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기본설계 참여업체로 하여금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계속 수행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함정 사업은 개념설계→기본설계→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후속함 건조로 나눠 진행된다. 결격 사유가 없는 한 기본설계를 수행한 업체가 양산을 위한 상세설계와 1번함 건조를 담당하는 구조다. 방사청 개청 이후 그간 18번의 함정 연구개발 모두 수의계약을 통해 기본설계 업체가 상세설계 및 선도함을 건조해 왔다.
KDDX 개념 설계는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수행했지만, 기본설계는 HD현대중공업이 진행했다. 따라서 방사청의 결정에 따라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HD현대중공업이 상세설계와 초도함 건조를 맡는다. 수주 경쟁 ‘2라운드’에서 HD현대중공업이 승자가 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 직원들의 군사기밀 탈취·누설에 따른 실형 판결과 방사청 계약심의위원회의 부정당 제재 ‘면죄부’로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설계 업체였다는 이유로 D현대중공업이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을 수의계약 형태로 가져가는건 문제가 있다고 역공을 펴고 있다.
또한 HD현대중공업에 대한 수의계약이 이뤄지지 않도록 한화오션 역시 복수의 방산업체 지정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방산물자 지정은 기본설계를 맡은 업체만 신청할 수 있지만, 방산업체 지정은 다른 업체도 신청할 수 있다.
다만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수의계약을 통해 HD현대중공업이 맡느냐, 아니면 경쟁 입찰 결과에 따를 것이냐 등의 사업 방식은 향후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결정된다. 방사청이 사업추진기본전략(안)을 마련해 사업분과위원회에 올리면 국방부 장관이 위원장인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사업 방식이 최종 결정된다.
수의계약으로 결정되면 자연스럽게 HD현대중공업이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맡게 되지만, 경쟁 입찰로 진행된다면 한화오션에게 승산이 있다. 여기서 경쟁계약 방식을 선택할 경우 HD현대중공업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제안서 평가에서 1.8점에 달하는 감점 조치를 받기 때문에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 수주가 어렵게 된다.
방사청의 고민도 깊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해상 전력의 핵심인 수상함 건조를 특정 조선업체가 독점하는 것을 매우 위험하다는 우려에서다. 언제라도 전시체제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기체계를 적시 조달할 의무가 있는 방사청은 수상함 기본설계를 맡은 기업을 입찰에서 배제할 경우 납기 지연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방산업계는 방사청이 결국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양강구도가 유지되는 방향으로 결정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호위함급 이상 함정을 설계·건조할 수 있는 기업은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유일하다. 이런 연유로 이번 방사청 결정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특히 KDDX 건조 사업은 탐재 장비·부품가 인상과 전력화 시기 등을 감안하면 이전 차기 호위함 ‘울산급 Batch-III’와 마찬가지로 △상세설계 및 초도함 건조 △2번함 건조 △3·4번함 건조 △5·6번함 건조 순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경우 상세설계 및 초도함 건조 사업을 어느 업체가 수행하든 총 6대의 물량을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나눠 맡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조선업계는 HD현대중공업과 환화오션의 경우 잠수함을 제외한 특수선 분야에서 비등한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한다. HD현대중공업은 1975년 최초의 국산 전투함인 울산함 개발부터 이지스구축함 배치-Ⅰ·Ⅱ를 개발했고, 해군의 중대형 함정 개발사업 23개 중 12개를 독자 개발했다. 수상함 수출도 국내 최다 실적을 보유 중이다.
한화오션도 1981년 방산업체 지정 후 최근까지 50여척의 수상함을 건조한 만만치 않은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운용 중인 해군 구축함 사업의 모든 라인업(KDX-I,II,III)에서 건조 실적을 가진 유일한 업체다. 잠수한 분야에선 한화오션이 장보고-Ⅰ·Ⅱ·Ⅲ 잠수함을 모두 수주하는 등 독보적 경쟁력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