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공정한 경쟁에 저해되는 차별적 조치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면서 미중 간의 통상 분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WTO 분쟁 조정 기능은 약화된 지 오래지만 중국은 이번 제소를 통해 ‘자유 시장 경쟁을 저해하는 나라는 미국’이라는 주장의 명분을 쌓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26일(현지 시간) WTO에 따르면 중국 대표부가 IRA로 빚어지는 차별적인 보조금 집행을 시정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분쟁 해결 절차가 이날 개시됐다. WTO 분쟁 해결 절차는 양자 협의, 패널 심리 및 상소 기구 심리, 판정 결과 이행 및 불이행 시 보복 절차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중국 대표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미명 하에 IRA가 시행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구매·사용하거나 특정 지역에서 수입해야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차별적 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문제 삼은 IRA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최대 입법 성과로 에너지 안보 및 기후위기 대응에 3750억 달러를 투입하는데 이 분야에서 중국 공급망을 탈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세부 지침을 보면 북미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 혜택이 주어지고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과 부품을 중국 등 해외 우려국에서 조달할 경우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미국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유럽연합(EU)과 한국도 우려를 전달한 바 있다.
미국은 중국의 문제 제기를 전혀 수용하지 않을 태세다.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성명을 통해 “IRA는 우리가 동맹과 파트너들과 함께 달성하고자 하는 청정에너지 미래에 대한 미국의 기여”라고 주장했다. 중국을 향해서는 “중국과 세계시장 모두에서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 중국 제조 업체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공정한 비(非)시장 정책과 관행을 계속 활용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미국은 중국의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도체뿐 아니라 미래 기술인 전기차 공급망에서도 중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상무부에 중국 국가 안보 위협 가능성을 언급하며 자동차에 탑재된 외국산 소프트웨어(SW)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미국 내 자동차에서 중국산 특정 부품의 사용이 금지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분석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또 중국산 전기차 수입 관세를 현재 27.5%에서 추가 상향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중국의 이번 제소로 WTO 분쟁 해결 절차가 개시됐지만 상징적인 조치에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국제무역 분쟁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는 대법원 격인 WTO 상소 기구는 2019년 12월 미국의 상소위원 선임 보이콧으로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