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보스가 제멋대로 후보를 공천해 ‘막대기’처럼 꽂아도 ‘금배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다.” 4·10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서울 강북을에서 비명계 박용진 의원을 끝내 공천에서 떨어뜨리고 지역 연고도 없는 친명계 인사를 공천하자 이런 얘기가 나왔다. 깃발만 내리꽂아도 당선이 가능한 지역이라고 생각하고 ‘묻지마 공천’을 밀어붙였다는 이유에서다. 이러니 ‘길에서 의원 배지를 줍는다’는 웃픈 농담까지 나온 것이다.
2022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이재명 대표는 당권 경쟁자였던 박 의원을 의식해 “박 의원도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재명의 민주당’은 박 의원에 대해 하위 평가 10% 딱지를 붙여 공천 과정에서 세 차례나 저격했다. 박 의원에게 ‘30% 감점’의 족쇄를 채우는 바람에 친명계 정봉주 전 의원과 조수진 변호사가 잇따라 공천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각각 ‘목발 경품’ 막말과 ‘성범죄 피해자 2차 가해’ 논란으로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민주당은 ‘시스템 공천’을 외치면서 이 대표의 잠재적 대권·당권 라이벌의 싹을 모조리 도려내는 토벌 작전에 나섰다. 그 빈자리에는 막말 논란을 빚은 충성파를 채워넣기도 했다. ‘친명횡재·비명횡사 사천(私薦)’이라는 비아냥이 나온 이유다.
민주당 지도부는 정치학 교과서에 실릴 법한 ‘호떡 공천’ 파동을 일으키고도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을 우습게 여기는 몰염치 공천을 강행한 것은 누구를 내세워도 당선시킬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어서다. 대다수 유권자들이 후보·인물보다는 정당·기호를 보고 선택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선거 풍토에서는 여야 정당의 보스 2~4명이 국회의원 대다수를 만들어내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야권에서 ‘금배지 제조’를 할 수 있는 리더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를 들 수 있다. 여권에서 유사한 역할을 하는 지도자로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꼽을 수 있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전체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80%인 240명가량이 사실상 여야의 핵심 리더에 의해 만들어진다. 전체 46석인 비례대표 후보 공천은 정당 보스의 의중에 따라 결정된다. 전체 254곳의 지역구 가운데 여야의 사령관들이 당기(黨旗)만 꽂으면 당선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선거구는 200곳에 육박한다.
반면 한 정당이 계속 독식하지 않고 당선자의 소속 정당이 자주 바뀌는 지역구는 50~60곳에 불과하다. 미국에선 ‘스윙 지역구(swing district)’라고 부른다. 스윙보터(swing voter·부동층)가 많은 선거구 가운데 40여 곳은 ‘한강벨트’가 있는 서울과 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 ‘금강벨트’를 포함한 충청권과 강원권, 영남권의 ‘낙동강벨트’ 등도 표심이 유동적인 지역으로 통한다.
호남권과 영남권의 대부분 지역 외에도 어느새 수도권의 다수 지역도 특정 정당의 ‘텃밭’으로 고착화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의 절반가량 지역구에서 같은 정당의 후보들이 연거푸 당선되고 있다. 이번에 공천 파동을 일으킨 서울 강북을은 현 지역구로 조정된 1996년 이후 민주당계 정당이 한 번도 승리를 놓친 적이 없는 지역이다. 서울 강북권 대부분과 서울 강남권 3구는 각각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아성’으로 굳어졌다.
중앙당 보스 몇 명이 조폭처럼 국회 길목에 버티고 서서 일방적으로 입성 여부를 결정해버리는 ‘막장 선거’를 막으려면 선거와 공천 제도를 전면 수술해야 한다. 미국은 지역 유권자와 당원들이 참여하는 오픈프라이머리를 통해 상향식으로 정당 후보자를 뽑는다. 영국에선 지역별로 당원들이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정한다. 우리도 공천권을 영·미처럼 지역의 주민들과 일반 당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번 총선에선 정당의 후보 필터링 기능이 무력화됐으므로 유권자들이 법과 도덕성에서 흠결이 있는 후보들을 걸러내는 게 순리에 맞다. 그 대신에 실력과 도덕성을 두루 갖춘 인사들을 국민과 지역 주민의 대변자로 뽑아야 한다. 그래야 범법자들이 외려 큰소리치는 비정상의 정치를 막고 나라 미래와 경제를 생각하는 상식의 정치를 복원할 수 있다. 아무 작대기나 금배지로 변신하는 일이 없도록 스윙보터들이 두 눈을 부릅떠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