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무기 수출을 엄격하게 제한했던 일본이 방산 수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매체들에 따르면 지난 3월 26일 일본은 국무회의에서 영국·이탈리아와 공동 개발 중인 6세대 첨단 전투기 수출을 승인한다는 방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은 방위장비·기술 이전 협정을 맺은 15개국에 전투기를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앞서 지난해 12월에는 일본은 자국에서 제조한 지대공 미사일 패트리엇 미사일3(PAC-3)과 구형인 패트리엇 미사일2(PAC-2) 등을 미국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를 간접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일본은 무기 수출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방위장비 이전 3원칙’ 운용 지침 개정에도 착수했다. 성사된다면 일본이 살상 능력이 있는 무기 완제품을 수출하는 첫 사례가 된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정부가 표명한 ‘무기 수출 3원칙’에 따라 무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다 아베 신조 정권 때인 2014년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을 마련해 이를 일부 허용했다. 다만 구난과 수송, 경계, 감시, 소해(바다의 기뢰 등 위험물 제거) 등 방위 장비의 수출 용도를 5가지로 제한해 살상 무기 수출은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인 무기 수출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일본은 향후 분쟁지역에 직접 무기를 수출하는 것도 가능하도록 방위지침을 개정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도 이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국내 방산업계는 일본이 ‘보통국가’로의 전환과 함께 K방산 돌풍이 거세지면서, 한국 방산업계 견제를 위한 속내가 담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 각국은 국방비를 늘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2021년 폴란드에 K2흑표 전차와 K2 자주표 등을 판매하며 세계 방산 시장에서 입지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 2022년~2023년 2년 동안 국내 방산 수출은 평균 150억달러 이상의 수출 성과를 냈다. 전투기 수출 역시 2023년 사상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었다. 2022년에 대비 321% 증가한 10억1000만달러 수출액을 기록했다.
반면에 일본은 평화헌법에 가로막혀 방산 수출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방산 업체들은 기껏 개발한 장비들도 자위대에만 납품이 가능할 뿐 다른 국가로 수출이 가능한 한국 업체들에 비해 제품 개발시 채산성이 매우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으로 한국 방산업계의 급성장이 일본 정부의 방산 생태계 재구축 의지에 불을 지피는데 영향을 미치면서 덩달아 일본 방산업체도 세계 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 모습이다.
한 군사 전문가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성장한 세계 방산시장에서 K방산의 돌풍이 일본 정부와 방산업체에게 자극을 준 것 같다”며 “일본이 강점을 가진 소재·부품·장비, 이른바 ‘소·부·장’을 중심으로 방산 수출 확대 전략을 펼치면 한·일이 방산 수출 경쟁 구도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방위성과 방산 기업들은 해외 방위산업 전시회에 뛰어들어 세일즈에 나서는 등 관·민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있다. 일각에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성장한 세계 방산시장의 새로운 다크호스”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당장 지난 2월에 열린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항공·우주 분야 방산 전시회인 ‘싱가포르 에어쇼’에 일본 방위성은 처음 부스를 마련했다. 사상 최대인 13개사가 참가해 세계 방산 업계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9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유럽 최대 방산 전시회(DSEI)에는 8개사, 지난해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해양 분야 방산 전시회(인도 퍼시픽)에는 10개사도 참가하며 세일즈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싱가포르 에이쇼에서 일본 방산업계의 간판인 가와사키중공업은 P-1 초계기와 C-2 수송기 등 자국산 군용기 모델을 전시했다. 방공 레이더(NEC), 인공지능(AI) 반도체(엣지코어틱스)와 같은 첨단 제품도 여럿 전시됐다. 또 일본의 강소 기업들이 항공·우주 부품(아사히금속공업, 쿠리모토, 타카기스틸) 견본품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전시회에 참석했던 국내 방산업계 관계자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제외하면 참여 기업이 전무했던 한국과 대조적인 모습”이라며 “최근 무기 수출을 급격히 늘려온 한국을 겨냥한 해외 방산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세일즈에 나서는 것 같다”고 했다.
일본 방산 업체들이 공격적으로 영업에 나선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방산 수출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은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날로 커지는 세계 방산 시장의 변화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외 무역에서 비중이 높은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의 경우에 2022년 군비 지출이 전년 대비 2.7% 증가한 5750억 달러(약 768조원)에 이를 만큼 확대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대내외적 환경이 일본으로 하여금 방산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최근 몇 년 새 폴란드와 동남아시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의 방산 수출 실적이 일본을 자극하고 있다”며 “일본 여권 내에선 넋 놓고 있다가는 손가락만 빨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시각은 일본 당국자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 방산 기업의 싱가포르 에어쇼 참가를 총괄한 방위성 산하 방위장비청의 후카와 히데키(府川秀樹) 국제장비기획실장은 당시 미 군사전문 매체 디펜스뉴스에 “일본 방산 기업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기회는 많지만 문제는 외국 업체와 같은 (수출) 경험이 없다는 것”이라며 “(전시회를 통해) 일본의 우수한 방산 기술을 선보이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방산 업체들의 존재감은 주목할 만한 수출 실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면허(라이선스) 생산하는 패트리엇 요격미사일(PAC2·PAC3)을 미국에 수출하기로 한 게 대표적 사례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엇을 지원하고자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일본에서 수입해 지원하는 것이다.
앞서 일본은 지난해 12월 필리핀에 첫 방공 레이더를 납품해 완제품의 첫 수출길을 열었다. 미쓰비시전기가 수주한 레이더 4대 중 첫 인도분이다. 확장성이 높은 아시아에 대한 수출이란 점에서 한국 방산업체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셈이다.
이 뿐이 아니다. 일본은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인 인도 시장도 개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함정 탑재 통신용 안테나 수출 계약이 임박한 상황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인도를 포함한 미국·호주와 4개국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는 물론 양국 간 외교·안보 장관(2+2) 회담 등을 통해 인도 무기 시장에 적극적인 세일즈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K방산 입장에서 가장 큰 우려는 일본의 전투기 수출에 나서는 것이다. 일본이 2030년대 실전 배치를 목표로 영국·이탈리아와 공동 개발 중인 차세대 전투기도 세일즈하기 위해 법 개정까지 한 상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내각이 연립 여당인 공명당을 설득한 끝에 지난 3월 중순에 차세대 전투기의 제3국에 수출할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수출 대상은 일본과 관련 협정을 맺은 총 15개국이다. 향후 미국과 유럽 국가를 비롯해 호주·인도·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베트남·태국·아랍에미리트(UAE) 등이 포함된다. K방산이 향후 주력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 전투기 시장에 일본이 다크호스로 등장한 것이다.
일본의 전투기 수출 대상 국가 대부분이 한국의 주요 방산 수출국이란 점 때문이다. KAI가 개발 중인 KF-21(4.5세대)과 일본의 차기 전투기(6세대)가 시장 경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방산업계 한 관계자는 “양국의 두 기종은 전투기의 세대를 구분하는 지표인 스텔스 성능 등에서 큰 차이가 나지만 계약 조건에 따라 경쟁 기종이 될 수도 있다”며 “일본이 수출 성사를 목적으로 대규모 차관 제공 등 유인책을 쓸 경우 KF-21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했다.
일본의 방산 수출에 청신호가 커졌다는 분석도 나와 한국 방산업계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미·중 간 전략 경쟁 상황이 일본의 방산 수출에 힘을 실어줄 것 이라는 전망이다. 중국이 빠르게 군사력을 끌어올리면서, 미국의 방산업체들이 생산 속도나 비용 측면에서 뒤처져 일본이 중국을 견제할 해법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특히 해군력 경쟁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8년이면 중국 해군의 군함은 440척 이상으로 늘어나지만, 미 해군 군함은 291척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미국 조선소들은 더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어, 미 정치권 안팎에선 조선 기술이 뛰어난 일본 또는 한국의 건함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미국은 관련 법(Jones Act)으로 외국에서 건조한 함정을 구매하거나 해외에서 함정을 건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안보 및 자국 조선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한 규제인 만큼, 중국과 군사력 경쟁이 치열해진다면 동맹에 문호를 여는 방향으로 일부 개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어느 국가를 파트너로 선정할 지가 관건이다. 현재는 일본이 미국과 최신형 요격미사일(SM-3 블록ⅡA) 등 주요 무기체계를 공동 개발하는 등 그간 방산 협력에서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서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미·일은 북·중·러 위협에 대항하는 극초음속 미사일도 공동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무기 판매도 한국 보다 우호적인 분위기다. 미국이 극비 보안으로 다루는 F-35 스텔스 전투기 운용에서도 해당 기종을 한국·일본·호주에 모두 판매했지만, 유독 일본·호주에만 수리 기지를 두며 한국과는 일정 부분 선을 긋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 입장에선 북한과 직접 대립에 있는 한국에게 극비 보안인 최첨단 무기 체계를 모두 내어주기 보다 한 발 물러서 있는 일본을 보다 신뢰하고 중국 견제에도 더욱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영준 국방대 교수는 “미국이 국방력 강화를 위해 고민하는 부분들을 한국 정부와 방산업체들이 공동으로 대처하며 미국에게 신뢰를 줄 필요가 있다”며 “정상회담을 포함한 고위급 채널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일본 보다 수출 경험이나 방산 기술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