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석유 수출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미국이 러시아산 석유의 빈자리를 대체하며 최대 수혜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서방국가들이 대러 제재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러시아산 석유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인 인도마저 미국산으로 돌아서고 있어서다. 주요 산유국들이 감산 조치를 이어가는 상황도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블룸버그통신은 3월 31일(현지 시간) 자체 집계 결과 유럽의 미국산 석유 수입량이 3월 하루 평균 220만 배럴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세계 유가의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산정 기준에 미국의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포함되면서 네덜란드 등으로의 수출량이 대거 늘어난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연간 기준으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유럽의 미국산 석유 수입량은 2021년 하루 평균 110만 배럴에서 지난해 180만 배럴로 큰 폭으로 늘었다. 서방의 제재 이후 유럽이 비(非)러시아 석유 공급원을 찾으면서 개별 국가 중에서는 프랑스(40%), 스페인(134%) 등의 미국산 선적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미국산 수입량 역시 같은 기간 140만 배럴에서 170만 배럴로 덩치를 키웠다. 이 밖에 북미와 중남미의 미국산 수입 규모도 우크라이나 전쟁 전과 비교해 각각 9%, 11% 늘었다.
러시아산 석유를 싼값에 대량 수입해온 인도에서도 최근 유사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데이터 분석 업체 케이플러에 따르면 인도를 목적지로 하는 미국 석유 선적은 3월 들어 크게 늘어나 약 1년 만에 최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러시아산 석유 수입량은 지난해 고점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80만 배럴 감소해 1~3월 100만 배럴 이하로 미국산을 밑도는 것으로 파악됐다. 인도 정유 업체들이 2월 미국의 제재를 받은 러시아 국영 소브컴플로트(PJSC)의 유조선 화물을 거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흐름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지 매체인 인디안익스프레스는 “인도 정부는 자국 업체들이 주요 7개국(G7)의 제재를 무시하거나 위반 위험이 있는 거래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산 석유에 대한 제재를 재개할 가능성도 미국산 석유 이외의 선택지를 좁히고 있다. 미국 정부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탄압으로 비판을 받는 베네수엘라에 대해 수출제재를 가해왔지만 금·석유 등 일부 품목에 한정해 면제 조치를 시행해왔다. 그러나 최근 성명을 내고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는 민주 인사를 구속하고 야권 후보들의 대선 출마를 금지하고 있다”며 “모든 후보의 대선 경쟁을 보장했던 합의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4월 18일 종료되는 석유·가스 거래 허가 조치를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인도 최대 석유화학 회사를 보유한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를 비롯해 인도의 주요 정유 업체들은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신규 구매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의 자발적 감산 조치가 지속될 경우 미국산 석유는 해외시장에서 더욱 영향력을 키울 것으로 점쳐진다. 산유국들은 2분기까지의 감산 유지 계획을 발표했지만 연말까지 연장할 가능성도 열어놓은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로이터통신은 올 상반기 OPEC의 세계 석유 시장 점유율이 27% 아래로 떨어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했다. 게리 로스 블랙골드인베스터스LLC 헤지펀드매니저는 “미국의 생산량이 늘어나는 가운데 OPEC과 러시아의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다”며 “미국은 더 많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