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고래들의 싸움 사이에 낀 약한 새우가 괜히 피해를 입는다는 의미다. 오랜 시간 한국은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취급을 받아 왔다. 지리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한국은 늘 새우였고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며 살았다. 한국인이 스스로 ‘우리는 새우가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한류다. 우리나라의 아이돌 가수들이 중국과 일본의 가장 큰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동남아를 섭렵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을 넘어섰다. 이제 누구도 한국의 대중 문화를 ‘새우’라고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새우(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고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는 유럽의 ‘한국학 석좌’ 라몬 파체코 파르도는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을 ‘새우’라고 생각하고 한국이 점차 새우에서 고래가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장기 발전에 기여한 교육 정책과 박정희 정권 시대에 벌어진 권력을 향한 다툼,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계기로 사회를 장악한 페미니즘 운동, ‘일베 저장소’ 등 한 세기간 이 좁은 땅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거의 대부분 빼놓지 않고 책 속에 담아냈다.
‘서울올림픽 개막식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저자가 한국의 모든 영광의 순간을 얼마나 애정을 갖고 지켜봤는지 활자 만으로도 그 마음이 느껴진다. 저자의 눈에 한국 사회는 G7, 삼성의 갤럭시, 블랙핑크와 BTS, 기생충과 웹툰 등 세계를 휩쓸고 있는 트렌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다.
덕분에 책은 한국학을 공부하려는 해외의 학생들이나 연구자들에게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부의 변화와 광주민주화항쟁, 촛불집회 등 시민 사회의 변화 등을 소개한 부분은 한국학을 배우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큼 자세하다. 그는 “1948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 한국 사회와 한국인이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진화 했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로 변화해 왔다”며 한국 사회의 변화에 경이로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한국은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닌 고래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진화하는 가운데 한 가지 만큼은 분명하다, 밝은 미래가 한국을 기다리고 있다’며 낙관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바라본다.
저자는 한국의 오랜 역사를 꼼꼼하게 공부해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사실관계 나열에 집중하면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해석이 이뤄지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