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올 1분기 깜짝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사상 최악의 한파를 겪었던 반도체 시장이 D램 등 메모리를 중심으로 살아나 ‘빅사이클’에 올라타면서 실적 개선을 견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1분기 잠정 실적은 매출 71조 원, 영업이익 6조 6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1.37% 늘어나 5분기 만에 70조 원대로 올라섰고 영업이익은 931%나 증가했다. 영업이익의 경우 5조 4000억 원인 증권가 전망치를 1조 원 넘게 웃돌았다. 지난해 1분기 4조 6000억 원의 적자를 냈던 반도체(DS) 부문이 5분기 만에 흑자로 돌아선 영향이 컸다. 시장에서는 DS 부문이 1조 원 중반대의 흑자를 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의 주력 상품인 D램 가격은 올 들어 가파르게 상승했다. 범용 D램 제품인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8Gb(기가비트)의 현물가는 지난해 12월 1.6달러 안팎에서 1.83달러 넘게 상승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낸드 가격 역시 오름세를 보이며 재고평가손실의 충당금 환입이 발생한 것으로 증권가는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DDR5,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 메모리 중심의 생산 전략도 효과를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 신석환 대신증권 연구원은 “올 하반기부터 HBM 공급이 본격화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역시 올해 최대 수주를 기록해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1분기 파운드리 가동률은 전 분기 대비 소폭 상승한 것으로 전해졌다.
DS 부문 외에 올 1월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AI) 스마트폰을 출시한 모바일(MX) 사업 부문에서도 견조한 실적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올 1분기 스마트폰 출하량은 6000만 대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시장은 MX·네트워크 영업이익이 4조 원 안팎을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역설적으로 메모리 가격이 상승하면서 원가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은 부담이다. 지난해 4분기 500억 원의 손실을 냈던 영상디스플레이(VD)와 생활가전(DA) 사업부 역시 1분기에는 고부가 가전 판매 확대 등에 힘입어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삼성전자가 1분기 시장 전망치를 훌쩍 뛰어넘는 호실적을 거둔 것은 인공지능(AI) 중심으로 불어오기 시작한 메모리반도체 훈풍이 범용 제품까지 확대됐다는 신호다. AI용 서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고성능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범용 메모리에 대한 수요도 동반으로 늘어나고 있다.
아직 완제품(세트) 수요가 완전히 살아나지는 않았지만 AI 수요가 버팀목 역할을 하면서 삼성전자가 감산 종료 시점을 예상보다 앞당길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감산 효과로 D램 가격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충분히 오른 데 더해 고부가 제품 중심의 판매량이 늘어난 상황에서 적기 수요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가 5일 전망치를 웃도는 실적을 발표하자 증권가에서는 일제히 반도체 사업의 영업이익 예상치를 올려 잡았다. 기존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의 1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는 7000억~1조 원 수준이었지만 실적 발표 직후 일부 증권사들은 1조 원 후반으로 예상치를 수정했다. 기대 이상의 시황 개선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삼성전자 수익성 회복의 가장 큰 요인은 메모리반도체 가격 정상화와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판매 확대다. 주요 메모리 업체들의 감산 효과가 하반기부터 시작되며 D램과 낸드 가격은 상승 곡선을 유지하고 있다. 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1분기 D램 평균판매단가(ASP)는 전 분기 대비 최대 20% 상승했고 낸드도 23∼28% 올랐다.
특히 혹독한 겨울을 보낸 낸드 시장에서는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제품 등을 중심으로 시장 회복 강도가 부쩍 높아졌다. 기존 하반기 흑자 전환 전망에서 1분기 조기 흑자전환을 이뤄냈다는 추정도 나왔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낸드 가격이 원가보다 낮아져 팔수록 손해를 보는 악순환에 빠졌지만 올해 들어 델·HP 등 서버 완제품(OEM) 업체들이 재고 감소와 낮은 계약 가격에 따라 기업용 SSD 구매를 빠르게 늘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AI 서버를 새로 증설할 때 데이터 전송 속도 등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SSD 제품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AI 반도체 수요가 범용까지 옮겨붙었다는 얘기다.
지난해 조 단위 적자로 현금 흐름이 악화한 것도 역설적으로 범용 메모리의 공급 여건을 개선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 D램에 생산 능력(CAPA)을 몰면서 상대적으로 범용 메모리 공급 제한 요인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범용 메모리의 가격 상승 곡선도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수요 대응을 위해 2분기부터 삼성전자가 사실상 메모리 감산 종료 수순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가 추정한 삼성전자의 2분기 웨이퍼 생산량은 178만 5000장으로 전년 동기 대비 비슷한 수준이다. 4분기에는 분기별 생산량이 200만 장을 넘기며 메모리반도체 침체 이전 수준까지 회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고 여건도 안정을 찾았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1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재고 주수는 9주를 기록했다. 메모리 시황이 최악의 수준이었던 지난해 상반기 국내 메모리 업체들의 재고 주수가 20주까지 치솟았던 것을 고려하면 정상화 수준에 도달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통상 메모리 업체들의 정상적인 재고 주수를 6주 안팎으로 본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질주 속도는 갈수록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범용 D램 시황 개선과 낸드 흑자로 실적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D램 칩을 12단까지 쌓은 HBM 3E 양산도 상반기 예정돼 있다. 모바일경험(MX) 사업부의 경우 2분기 신작 출시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적 성장이 어렵겠지만 ‘AI폰’이라는 프리미엄 효과로 ASP를 높여 시장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최근 글로벌 출시한 AI 비스포크 시리즈를 중심으로 디지털가전(DA) 사업부 실적 성장도 노린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본격적인 반도체 업턴(상승 추세)에 올라타면서 올해 영업이익 30조 원대를 회복하고 내년에는 50조 원대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메모리 호황기였던 2021년(51조 6339억 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D램이 이미 지난 분기 흑자 전환한 가운데 낸드 흑자 전환 시점이 앞당겨져 메모리 전반의 실적 개선이 가속화할 것”이라며 “어드밴스드 패키징과 HBM 역량 강화로 메모리와 비메모리 간 시너지도 하반기부터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