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한국어[서우석의 문화 프리즘]

서우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요즈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글로 자국어를 표기하는 국가가 나타나는가 하면, K팝에 몰입한 청소년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나라도 여럿 생겼다.


한국 문자와 한국 말의 성격을 생각해보자. 먼저 한글을 보자. 한글을 배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석 능력을 획득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분석이다.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 소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생각한다”는 뜻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그 소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어느 나라 문자이건 발음 덩어리를 음절로 나누는 일은 첫 번 일어나는 통상적인 작업이다.


한글은 한 단계 더 진전한다. “생각한다”를 “생/ 각/ 한/ 다”로 나눈 다음 다시 각각을 자음과 모음으로 분석한다.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리 덩어리를 음소차원까지 분석하려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さ, し, す, せ, そ (사, 시, 수, 세, 소)”로 음절을 분절하지만 다시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지 않는다. 영어 역시 이런 점에서 그 분절이 명확하지 않다. 같은 “i”라도 경우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 “gh”나 “k”처럼 발음하지 않는 경우도 한 둘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한글의 이런 엄격한 논리를 터득한 아이들에게 사고의 단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의 나의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 보자. 초등 1년 때, 중 1이었던 형이 나에게 “영어는 정말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려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말의 경우 “생, 각, 한, 다” 등에 해당되는 영어의 음절이 있을 것이며, 이 음절의 대응을 알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만큼 논리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어의 번역이 단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절 또는 음소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형도 그렇게 상상했었기 때문에 영어가 어렵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이런 논리적 경직성이 범국민적으로 생긴다면, 옳고/그름을 엄격하게 나누는 2분법에 함몰되는 것이 아닐까. 해방 후 한글 전용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한국인은 거의 전부가 한글 전용세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고가 한자 시대와 달라졌다면 말이다.


한국어를 생각해 보자. “꽃이 아름답다”와 “꽃은 아름답다”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모교 출신인 20대 후배로부터 들은 답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감각적이고 ‘꽃은 아름답다’는 의도적”이라는 답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문장의 성격을 파악한 대답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현실의 이야기다. 즉, 사실을 서술한 말이다. 반면, “꽃은 아름답다”는 현실이 아닌 마음 속의 이야기다. 다르게 말해, 개념서술이다.


한국어는 “는”과 “이”에 따라 개념서술, 사실서술로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개념서술이 사실서술로 바뀌면, 토픽 서술이 된다. 개념 서술에 현실을 알리는 단어인 “이”가 들어갈 경우 토픽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이 꽃은 아릅답다”는 토픽서술이다. 섬세한 경우도 있다. “꽃은 아름답네요”가 그런 경우다. 이 말은 “꽃은 아름답다”와는 다르다. “~네요”는 현실적 대화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꽃은 아름답네요”는 토픽서술이다.


토픽을 정하는 “는”은 문장의 여러 성분에 첨가가 되어 그 앞 단어의 의미 범주를 토픽으로 설정한다. “철수가 오늘 학교에 간다”의 경우 “철수는 오늘 학교에 간다”, “철수가 오늘은 학교에 간다”, “철수가 오늘 학교에는 간다”등이 가능하다. “는”이 여러 곳에 붙는다는 통사론적 설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토픽은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의미이므로 한 문장에 토픽이 한번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예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 문장 안에 “는”이 두 번 들어가 비문이 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 것은 토픽 서술에 대한 교육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에도 개념서술 문장이 있다. 그러나 이를 명시하는 문법적 장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Fire is hot”은 개념서술인지 사실서술인지 분명치 않다. 보통, “불은 뜨겁다”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개념서술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Fire is hot”을 평평하게 발음하면 사실서술 쪽으로 치우치고, “fire”를 강하게 발음하면, 개념서술이 되지만, 토픽서술로도 이해된다. “Fire is hot”에서 “hot”을 토픽으로 삼으려면, “hot”을 강하게 발음하거나 “hot”을 앞으로 끌고와 “Hot is fire”로 말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복잡하다. 문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분명하다. 개념서술에 현실적 지시가 들어가면, 또는 사실서술에 “는”이 개입되면 토픽서술의 문장이 된다. 한국어는 이를 문법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한국어의 사실/개념/토픽 서술은 한글의 영향 만큼이나 우리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니?”의 뒤에는 그런 영향이 숨어있을 것이다. “너는 지금 토픽 개념없이 이야기 하는 구나” 하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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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음악대학교 학장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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