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참패 이후 국정 쇄신에 나선 정부가 ‘갑질 의혹’을 받고 있는 정재호 주중국대한민국대사(주중대사)에 대한 본격 현지 조사에 착수한다. 정 대사는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맞서고 있지만 외교부의 조사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조사 결과에 따라 해임 조치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사의를 표명할 경우 의혹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총선 참패에 따른 인적 쇄신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되느냐에 따라 정 대사의 거취도 정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11일 외교부와 주중대사관 등에 따르면 15일부터 외교부에서 파견된 감찰담당관들은 지난달 초 주중대사관에서 근무 중인 주재관 A씨가 외교부에 정 대사의 비위 의혹을 고발한 사안에 대한 현지 조사에 나선다. 이들은 14일 입국해 정 대사와 A씨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약 2주 동안 사실 관계를 확인할 예정이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관련해서 확인해드릴 사안이 없다”고 밝혔으나 현지 조사에 나서는 것에 대한 사실 여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부인하지 않았다.
앞서 지난달 28일 일부 언론을 통해 정 대사의 ‘갑질 의혹’이 공개됐다. A씨는 정 대사가 본인과의 대화하는 과정에서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았다고 주장하며 외교부 본부에 이를 신고했다. 그는 정 대사의 일부 발언을 녹음해 외교부에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일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외교부는 재외공관에서의 비위 등 여러 사안에 대해 항상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며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칙에 따라서 철저히 조사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이달 초 현지 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사전 조사 등에 시일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총선에 악재가 될 것을 우려해 조사 시점을 총선 직후로 미뤘다고 해석했다.
정 대사는 논란이 불거진 이후 정례 브리핑을 취소하는 등 언론과의 접촉은 피하면서도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한국영화 상영 행사도 파키스탄, 레바논, 사모아 등 11개국 대사를 초청해 예정대로 진행했다.
외교부의 현지 조사로 인해 정 대사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 그의 거취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 2018년 김도현 전 주베트남 대사는 청탁금지법 위반과 함께 부하 직원에게 폭언을 했다는 의혹으로 외교부로부터 해임됐다. 정 대사 역시 조사 결과에 따라 최고 해임 조치 될 수 있다.
총선 참패로 인해 줄줄이 사의를 표명한 당·정·대통령실 관계자에 이어 인적 쇄신 범위가 확대될 경우 중국·일본·러시아 등 주요국 1기 대사로 교체 범위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약 1년 10개월이 지난 2019년 3월 미국을 제외한 중국·일본·러시아 등 이른바 ‘주변 4강’ 대사를 교체한 바 있다.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을 일부 바꾼데 이어 외교라인에도 변화를 준 것이다. 지난 10일 총선에서 충격적인 참패를 기록한 정부·여당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인적 쇄신의 폭을 키울 경우 주요 국가의 대사도 과거처럼 교체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뜩이나 정 대사의 경우 갑질 의혹이 제기된 이후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도 사퇴 요구를 받고 있다. 민주당 홍기원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지난 2일 논평에서 “정재호 대사가 ‘갑질 논란’으로 외교부 조사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대사 자리를 부여잡은 채 놓지 않는 중”이라며 사퇴를 촉구했다. 계속해서 정 대사를 끌고 갈 경우 더해질 정부의 부담을 감안하면 이번 기회에 정 대사가 정리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전망이 커지는 이유다.
정 대사가 직접 사의 표명을 할 가능성도 있다. 최근 이종섭 호주대사 역시 총선을 앞두고 논란이 커지자 임명 25일만에 사임했다. 이에 대해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상식적으로 보면 현재 상황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대통령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고 모양새도 나을 것”이라면서도 “평소 알려진 정 대사의 성향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상황에 사임할 경우 의혹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 정부 첫 주중대사인 정 대사는 미국에서 중국을 연구한 전문가로, 윤석열 대통령과는 충암고 동기동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