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재벌가 작품 뒤 숨은 이야기 [아트씽]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미술작품]
박서보,김창열,이강소…고가 작품 즐비
비싼 ‘진품’ 대신 ‘모사작’ 제작해 촬영
홍해인, 캐릭터부터 결말 그림으로 암시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이 전시된 퀸즈타운 지하2층 가족 거실 내부 /사진출처=tvN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이 전시된 퀸즈타운 지하2층 가족 거실 내부 /사진출처=tvN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이 전시된 퀸즈타운 지하2층 가족 거실 내부 /사진출처=tvN

퀸즈타운 지하 2층 가족 거실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가 열렸을 때 맨 처음 보이는 작품은 박서보(1931~2023)의 ‘묘법’ 연작 3점이다. 재벌가 재력과 안목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거실의 중앙 벽면에는 김창열(1929~2021)의 1993년 작 ‘물방울 SH93006’이 걸려있다. 100호 크기의 그림이 벽에 맞춤한 듯하다. 퀸즈 창업주 홍만대 회장의 자택 내 집무실에서는 이강소(81)의 ‘허(虛·Emptiness)’와 ‘섬으로부터(From an Island)’ 연작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회사 집무실에는 김창열의 ‘물방울’ 두 점이 걸려 있다.



홍만대 회장의 퀸즈타운 가족 거실의 중앙 벽면에는 김창열의 1993년 작 ‘물방울 SH93006’이 걸려 있다. /사진출처=tvN

홍만대 회장의 퀸즈타운 가족 거실의 중앙 벽면에는 김창열의 1993년 작 ‘물방울 SH93006’이 걸려 있다. /사진출처=tvN

김수현·김지원 주연의 tvN 주말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 못지않게 ‘그림 보는 재미’로도 인기다. 퀸즈그룹 재벌 3세이자 백화점 사장인 홍해인(김지원)과 용두리 이장 아들이자 명문대 법대 출신의 변호사 백현우(김수현) 부부의 위기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눈물의 여왕’은 지난 3월 9일 첫 방송 이후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 14일 방송된 12회 시청률 20.7%(닐슨코리아 기준)로 자체 최고를 경신했다. 드라마의 배경이 재벌의 집이다 보니 등장하는 미술품들은 예술 애호가인 가족의 취향과 미술투자에 대한 안목을 드러내며 사실성과 몰입도를 높이는 중이다. 그림을 통해 캐릭터의 성향과 내용 전개의 실마리도 유추할 수 있다.



극중 홍만대 회장은 나폴레옹의 존경해 그와 관련된 유물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진출처=tvN

▲나폴레옹 닮고 싶은 회장님의 취향


‘명동 뒷골목 구두닦이로 시작해’ 퀸즈백화점과 퀸즈마트 등 대기업을 거느린 재계 서열 10위의 퀸즈그룹을 일으킨 창업주 홍만대 회장은 자수성가의 전형적 인물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명언을 남긴 나폴레옹을 좋아해 그와 관련된 유물까지 수집해 별도 수장고에 모아둘 정도로 적극적인 컬렉터다. 극중에서 “2014년 모나코 왕실이 경매에 내놓은” 나폴레옹 유물을 사들였다는 것은 팩트이고, 홍 회장과 흡사한 실존인물도 있다. 김홍국 하림 회장이다. 김 회장은 2014년 모나코 왕실이 출품한 나폴레옹 유품 280여 점 중 ‘이각모’라 불리는 나폴레옹의 모자를 약 26억원(188만400유로)에 낙찰받았다. 나폴레옹 모자와 초상화, 훈장 등의 유물은 경기도 성남시 NS홈쇼핑(하림그룹 계열사) 내 ‘나폴레옹 갤러리’에 전시중이다. 드라마 속 홍 회장은 나폴레옹의 검을 소장한 것으로 각색됐으며, 실제 재벌가 회장들이 그러하듯 불상과 도자기 등 고미술품을 수장고에 두고 있다. 침실 앞 복도에는 금가루를 안료에 개어 검은 바탕에 산수화를 그린 ‘금니화’가 마주 걸려있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만대 회장의 회사 집무실 벽에는 김창열의 ‘회귀’(왼쪽)과 ‘물방울’이 나란히 걸려있다. /사진출처=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만대 회장의 자택 집무실에는 이강소의 작품이 걸려있다. /사진출처=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만대 회장의 자택 거실에는 남도 문인화의 현대적 계승자이자 의재 허백련의 장손인 허달재의 작품들이 곳곳에 걸려있다. /사진출처=tvN

가족거실에 박서보·김창열의 작품을, 집무실에 이강소 그림을 둔 홍 회장의 침실 머리맡은 남도 문인화풍의 현대적 계승자이며 의재 허백련의 장손자인 허달재 화백의 백매화가 차지하고 있다. 흰 꽃이 진주처럼 반짝이며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지난 2022년 5월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청와대가 일반에 공개됐을 당시, 휑하게 비어버린 청와대 관저를 지키고 있던 미술품이 바로 허달재의 두 폭 매화 그림이었다. 홍 회장의 거실에서는 허 화백의 수묵화 연작도 만날 수 있다. 홍 회장의 집무실에는 출입문을 사이에 둔 양쪽 벽에 나란히 이강소의 그림이 걸려있다. 서양화지만 서예의 필력 같은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데, 실제로는 대상이나 의도를 배제한 채 ,기운과 붓질만을 남겨놓은 작품들이다. 개념미술로 분류되는 그림이다. 이강소는 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흰 가루를 뿌려놓은 바닥 위를 닭이 지나다니며 발자국 그림을 그리게 하는 등 퍼포먼스와 개념미술로 유명하다. 지난해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을 시작으로 미국 순회전이 한창인 ‘한국의 실험미술’ 전시에서 주요 작가로 소개됐다. 과거 방송을 통해 공개된 윤석열 대통령의 서초동 자택에도 이강소의 판화가 걸려있어 주목받은 바 있다.



김창열의 '물방울 SH93006'은 고가의 작품이라 드라마 제작진은 원화가 아닌 모사품을 제작해 걸고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제공=표갤러리

▲수억원 고가 작품으로 어떻게 드라마 찍을까?


‘물방울 화가’ 김창열은 작품값 비싼 한국미술가 톱10에 든다. 경매에서 10억원 이상에 작품이 낙찰된 ‘밀리언달러 클럽’ 작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고가의 유명화가 작품을 어떻게 드라마 속 소품으로 활용할까? 진품을 촬영현장에 두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가의 보석·시계·자동차 등은 드라마 협찬품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미술품은 훼손될 경우 대체가 불가능하다. 많은 인력이 오가는 곳인 데다 강한 조명 등으로 작품이 훼손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제작진은 작가 측에 저작권 활용 동의를 구한 후 작품 이미지로 모사품(레플리카)을 만들어 촬영에 이용한다. 박서보재단 측 관계자는 “지난해 드라마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의뢰받은 작품들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했다”면서 “앞서 ‘재벌집 막내아들’ 등의 드라마에 박서보 화백의 작품이 등장한 바 있고, 어떤 작품이 어디에 걸리는 지에 대한 세부 내용은 제작진이 결정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이강소 스튜디오의 이선민 이사는 “실제 작품이 아니라 저작권 사용승인과 함께 작품 이미지를 제공했고, 드라마 내용과 촬영 공간에 맞춰 실제 원작보다 작게 축소 제작된 모사작도 있다”면서 “저작권 계약을 할 때 드라마 내용에 대한 비밀유지 서약도 함께 진행했다”고 귀띔했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주인공 홍해인의 침실 머리맡 그림은 전은숙 작가의 추상화로, 기억이 흐릿하고 몽환적 착시를 경험하는 주인공의 상황과 함께 화사하고 희망적인 색감을 통해 해피엔딩을 유추하게 한다. /사진출처=tvN

▲강한 자아를 가진 홍해인


홍해인의 침대 맡에는 벽 전체와 같은 폭의 추상화가 걸려있다. 화사한 색감이 돋보이는 전은숙 작가의 작품이다. 파스텔톤의 온화함과 봄꽃 색을 모은 듯한 자연미가 느껴지는데, 색감만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풍긴다.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지 않고 색과 붓질 만으로 화면을 채운 추상화인데, 극증 희귀 뇌종양을 앓는 홍해인이 또렷했던 기억을 잃고 몽환적인 환각에 종종 빠져드는 상황을 이미지로 구현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색채가 밝고 따뜻해 긍정적 결말에 대한 희망도 읽어내게 한다. 그의 방에는 유난히 사진과 그림 등 인물화가 많은데, 평범하지 않은 작품 선정을 통해 강력한 자아와 자기애를 가진 홍해인의 성향을 암시한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해인의 침실 출입문 앞에 걸린 다비드 자맹의 'Severine au bougainvillier' /사진제공=비아캔버스

홍해인 사장의 주된 활동무대는 퀸즈백화점인데, 홍 사장의 침실과 집무실을 연결하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는 그림들은 프랑스 출신의 작가 다비드 자맹(David Jamin)의 작품이다. 단꿈에 취한 듯한 흰 셔츠의 인물이 등장하는 백화점 집무실 앞의 대형 그림, 진달래색 꽃에 휩싸인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홍 사장 침실 문 앞의 인물화, 사랑에 빠진 연인이 등장하는 백현우 방문 앞 그림부터 강아지와 노는 아기를 그린 백현우 침실의 그림까지 모두 자맹의 작품이다. 이는 진취적인 경영인,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 서로 사랑하는 연인, 아이를 가슴에 묻은 젊은 아빠 등 그림이 걸린 공간 속 주인의 성향을 암시하는 동시에 인물들을 서로 연결하는 장치다. 몰래 이혼을 준비했음을 들킨 백현우를 향해 홍해인이 총구를 겨누는 상상 속 서재 장면에 등장했던 파란 바탕 위 흰 꽃그림도 자맹의 그림이었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주인공 홍해인의 백화점 집무실 앞에는 몽환적인 필치로 인물화를 그리는 프랑스 작가 다비드 자맹의 'Severine au bougainvillier'가 걸려 있다. /사진제공=비아캔버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주인공 홍해인의 백화점 집무실 앞에는 몽환적인 필치로 인물화를 그리는 프랑스 작가 다비드 자맹의 'Severine au bougainvillier'가 걸려 있다. /사진출처=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해인의 수장고에는 러시아 추상화가들의 회화를 배경으로 중진조각가 윤성필의 작품들이 배치돼 있다. /사진출처=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해인의 수장고에는 러시아 추상화가들의 회화를 배경으로 중진조각가 윤성필의 작품들, 백자 달항아리 등이 배치돼 있다. /사진출처=tvN

드라마는 홍해인 사장의 미술품 수장고도 보여줬다. “작가들 죽고나면 그림값 오른다고 해서 죄다 90대 화가들 것으로만 모은 작품”이라고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40대 중진 조각가 윤성필의 작품이었다. 그의 기하학적인 추상조각과 어우러진 그림들은 러시아 추상미술이다. 칸딘스키나 말레비치처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화가들은 아니지만 그들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작가들로, 높은 안목을 가진 컬렉터가 선호할 만한 작품들이다. 작가들이 사망한지 100년이 지나 저작권 사용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수철의 방에는 베리킴 등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걸려 발랄한 MZ컬렉터의 취향을 대변한다. /사진출처=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홍수철의 방에서는 임지빈 작가의 ‘베어브릭’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이는 발랄한 MZ컬렉터의 취향을 대변한다. /사진출처=tvN

▲MZ 취향, 직업 전문성, 취향 고루 담은 그림들


젊은 신혼부부 홍수철의 집은 상대적으로 발랄하다. 알록달록한 원색에 화려한 이미지가 지배적인 그의 집 거실 작품들은 베리 킴. 부드러운 테디베어가 진화한 듯 딴딴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서 있는 작품들은 임지빈 작가의 ‘베어브릭’이다. 홍수철은 아직까지는 투자가치가 높지 않지만 잠재력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택했다. 소신있는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라이프스타일에 끌어들이는 MZ 컬렉터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다.


용두리 이장집 아들 백현우의 캐릭터는 퀸즈백화점 내 법무이사 방에 걸린 작품 한 점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백윤조 작가의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큰 서류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남자의 옆모습을 담고 있다. 하늘색 배경 위로 유난히 발이 크게 표현된 인물이 두드러진다. 큰 발이 보여주는 안정감과 우직함, 서류가방을 든 전문직 남성의 성실함이 극 중 백현우 캐릭터와 맞아 떨어진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홍해인 부모의 거실에 걸려 등장하는 노정란의 색면추상화는 극중 인물들의 고급스런 예술 취향을 드러낸다. /사진출처=tvN

홍해인의 엄마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한 거실의 색면 추상화는 한국의 여성 중견화가 노정란의 작품이다. 미국의 추상미술가 마크 로스코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색의 선택에서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색을 겹친 후 20~30번 갈필을 반복해 아래의 색이 화면 위로 올라오게 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작가다.


백현우와 홍해인의 집 거실 곳곳에서는 조각가 김태수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의 움직임과 유기적 형태를 초현실적으로 선명한 색감으로 보여준다. 하얗고 깔끔한 거실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집안 곳곳에 놓인 프리저브드 플라워와 조화를 이룬다. 작품으로 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드라마 속 모든 그림이 원화가 있는 작가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 일부는 드라마 미술팀이 극의 분위기에 맞게 직접 그리거나 제작하기도 한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극중 홍해인과 백현우가 독일의 호텔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대표작 판화를 볼 수 있다. /사진출처=tvN

호텔 등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할 때는 원래 공간의 작품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치료차 간 독일의 호텔방에서 백현우와 ‘밀당’하는 홍해인의 뒤로 보인 다색 점무늬 작품은 영국의 유명화가 데미안 허스트의 판화다. 홍해인의 아버지 홍범준이 집에서 쫓겨난 형 홍범석이 투숙한 호텔에 찾아갔을 때는 오수환, 문범 등 한국 중견화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호텔에 이들의 작품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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