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작가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세요? 완성이 돼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백척의 장대 위에 올라 있는데 떨어질지도 모르는 미지의 허공에서 다시 나아가야 하는 위기의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장편 ‘철도원 삼대’로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황석영 작가는 17일 서울 창작과비평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원로 작가가 필연적으로 겪는 위기의식으로 입을 뗐다. 그는 “계속 작품을 쓰겠다는 건 백척간두 상황에서 계속 시도하겠다는 의지”라며 “앞으로 세 작품은 써내겠다”고 말했다.
작가 황석영은 근대의 극복과 수용을 평생의 소설 쓰는 사명으로 삼아왔다. 77세에 집필한 ‘철도원 삼대’에서 철도를 중심으로 한 근대 산업 노동자들의 삶을 정면으로 다뤘다. 황 작가는 “전 세계의 근대는 다 왜곡된 모습이지만 동아시아는 모양은 그럴 듯함에도 불구하고 안의 내용물을 보면 근대를 극복하지 못 하고 있다”며 “이전에는 식민지 시대, 분단 시대를 따로따로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근대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최근 전세계 문단에서도 황 작가가 테마로 삼는 근대 극복의 서사가 주목받고 있다. 그는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브라질 작가 이타마르 비에이라의 ‘구부러진 쟁기(Crooked Plow)’를 언급하며 “브라질에 노예제가 들어온 뒤 100년을 지나 현재를 관통하는 이야기인데 요새 이 같은 작품들이 사방에서 주목받고 있다”며 “20세기를 거쳐서 21세기로 들어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성을 잃은 것이 그 이유”라며 “다양성이란 이름 하에 불안정한 이행기에 있다 보면 뒤를 돌아보게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사라진 문인들을 언급하며 “사실 절필 선언을 하는 게 가장 심플하다. 그렇게 안하고 써보고 싶다고 했을 때 말년에 졸작을 쓰는 경우가 참 많다”며 “많은 훌륭한 문인들이 회피하거나 도망치거나 자살을 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70대 중반이던 2017년 자전적 기록인 ‘수인’을 써낸 뒤 위기를 겪었다. 황 작가는 “6000매에 달하는 내 이야기를 쓰고 나니 위, 간, 쓸개 모든 내장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며 “일년 간 멍하니 있다가 짐 싸들고 미륵산 암자에 올라가 쓰기 시작한 것이 ‘철도원 삼대’였다”고 술회했다. 내달 영국으로 출국을 앞둔 그는 “꼭 상을 타서 돌아오겠다”며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에 대한 기대감도 내비쳤다.
부커상 결과와 관계 없이 하반기부터 집필 일정도 빼곡하게 세웠다. 앞으로 쓸 소설들에 대한 모티브도 들려줬다. 그는 “오는 7월부터 쓰려고 하는 작품은 군산의 한 마을에 팽나무가 있는데 세종 6년부터 자리를 지켜왔다”며 “그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내친 김에 다른 두 개의 작품에 대한 힌트도 줬다. 하나는 홍범도가 카자흐스탄으로 쫓겨간 뒤 생의 마지막 3년간의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의 35년 간의 도망 생활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살아 생전에 제 문학관을 세울 계획이 없다”며 “군산에 호수 전망의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평생에 가장 좋은 작업실을 마련한 것 같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