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수술 예정인데 혹시라도 미뤄질까 봐 걱정돼서 잠도 못 자요.”
1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암병동. 청주에서 올라온 40대 암 환자 김 모 씨는 의료 공백 사태가 길어지면서 위암 진단을 받고 잡아놓은 수술 예약이 혹시나 취소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의료 공백 사태가 두 달 가까이 장기화하면서 치료가 시급한 중환자들의 고통도 길어지고 있다. 총선을 치른 지 1주일이 지났음에도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가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만큼 의정이 사태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 씨는 “지난달 초에 암 의심 진단을 받고 지금 네 번째 아산병원 방문했다”며 “전화 연결부터 어려워 첫 예약을 잡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주변에서 아산병원을 다녔던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한 달 이내에 수술을 잡았다고 했다”며 “우리는 한 달 반이 넘어서야 겨우 수술 일정이 잡혔다”고 혀를 내둘렀다.
충남에서 암 수술 후 검진을 위해 올라온 박 모 씨 역시 “지역에서 올라오는 사람의 경우 응급이나 예약이 아니고서야 신규로 대학병원에 오기 어렵다”며 “운이 좋아 이곳에서 수술을 받아 암 수술 후 검진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미리 잡아둔 일정이 취소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광주에서 80대 남편의 보호자로 온 이 모 씨는 “첫차를 타고 오전 6시 전에 출발해서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원래 폐와 안과 등 총 3개 과에 검사·진료 예약을 했는데 갑자기 안과 진료가 취소됐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김 모 씨 역시 “간이 안 좋아서 1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러 온다”며 “의사들의 집단 사직 여파가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우려했다.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며 신규 예약이 어려워지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발걸음도 눈에 띄게 줄었다. 60대 택시기사 강 모 씨는 “원래 오전 시간대 아산병원에 가려면 동서울터미널에서부터 차가 줄줄이 서 있는데 2~4월 매달 한산해지는 느낌”이라며 “병원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게 체감된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길어지는 의료 공백 사태로 병원과 환자들이 보는 피해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지만 사태의 핵심 주체들은 의대 증원 문제를 두고 지루한 샅바 싸움만 계속하고 있다. 정부는 대화를 계속하겠다면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최소 규모’로 칭한 기조를, 의료계는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가 전제 조건이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는 탓이다.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 간 평행선은 두 달 넘게 접점이 생기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이 이달 1일 대국민 담화에서 의료계에 과학적·합리적이고 통일된 의견을 달라고 요청하고 전공의들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보이면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일기도 했다. 특히 윤 대통령과 전공의 단체 대표인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4일 사태 발생 이후 처음으로 만나며 기대가 현실이 될지 주목됐으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끝났을 따름이었다.
정부는 이날에도 의료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고 강조하며 흔들림 없이 완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에서 “의료 개혁은 지역·필수의료를 강화하고 미래 의료 수요에 대비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의료 개혁에 대해 “근무 여건을 개선하고 의료 시스템을 혁신하는 것”이라며 “그간 의사 단체에서 제안한 개선 방안과 다르지 않으므로 대화의 자리에 나와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함께 논의해나가자”고 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물러서지 않을 뿐 아니라 대화 형태도 정부와 ‘1대1’로 이뤄져야 한다며 부정적이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전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대통령이다. 의대 증원을 멈추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구에서 새로 논의할 수 있도록 방침을 바꿔달라”고 밝혔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도 “의료계 단일안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의대 정원 원점 재검토였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정부가 의료계뿐 아니라 노동계, 환자 단체, 시민 단체 추천 전문가들로 꾸려 다음 주 공식 출범할 계획인 의료개혁특위에 대해서도 의사 단체들은 회의적 입장만 보일 뿐이다. 임현택 차기 의협 회장 당선인은 “사회적 협의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협의체는 의료계와 정부가 1대1로 대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