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여기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얼마나 가야 하나요.”
박명수(47) 씨는 정류장을 향해 첫걸음을 뗀 지 1분 만에 길을 잃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110m 떨어진 정류장은 지도 애플리케이션상 ‘도보 2분’으로 안내돼 있다. 하지만 중증 시각장애가 있는 박 씨에게는 소용 없는 정보다. 지하철 역사 내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도 익숙하게 이용하는 박 씨지만 툭하면 점자블록이 끊기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널린 길거리로 나오니 상황이 달라졌다. 순간 방향감각을 잃은 박 씨는 인기척이 느껴질 때까지 한참을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미처 지팡이가 확인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결국 박 씨는 취재진과 동시에 출발했지만 8분 만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조차도 주변을 지나는 시민에게 세 차례에 걸쳐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장애인의 날을 이틀 앞둔 18일 서울경제신문은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짚어보기 위해 동행 취재에 나섰다. 용산구의 한국점자교육원에서 근무하는 박 씨는 취재진과 함께 삼각지역에서 서초구에 위치한 국립장애인도서관으로 각자 이동해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기자는 비장애인 입장에서 버스와 카카오택시를, 박 씨는 지하철과 장애인 복지콜과 바우처택시를 이용해 같은 거리를 왕복하며 소요 시간을 비교하는 방식이다.
장애인에게 버스는 휠체어 탑승 여부에 상관없이 까다로운 교통수단이다. 박 씨는 “버스는 1년에 한두 번 탈까 말까 한다”며 경증 시각장애인이 아닌 이상 버스 승하차는 물론이고 정류장을 찾아가는 것부터 ‘엄청난 도전’이라고 말했다. 스크린도어마다 점자 표기가 부착돼 현 위치와 이동 방향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지하철과 달리 지상 버스 정류장의 경우 관련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
박 씨는 “중앙대로에 위치한 정류장은 특히나 난도가 높다”면서 “비라도 내리면 우산으로 주변 소리가 차단돼 더욱 위험하기에 아무리 돌아갈지라도 지하철을 택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0년 한국시각장애대학생회의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82%가 가장 이용이 어려운 교통수단으로 버스를 꼽은 바 있다.
기자는 버스, 명수씨는 지하철 타 보니…도착 시간 ‘24분’ 차이나
이날도 박 씨는 지도 앱이 ‘최적 경로’로 추천한 470번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택했다. 4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사당역에 내린 박 씨는 역사 내 지하상가로 잘못 들어서거나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시민과 몇 번이고 부딪힐 뻔하는 등 난관을 겪었다. 하지만 박 씨는 ‘이 정도는 약과’라면서 선로에 세 번이나 추락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스크린도어가 생기고 하차 객실 번호도 안내해주는 지금이 훨씬 나아진 상황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박 씨는 오후 4시 12분에야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도착했다. 동시에 버스를 타고 출발한 기자보다 약 24분이 더 걸렸다. 박 씨가 잠시도 쉬지 않고 잰걸음으로 이동해 따라가던 일행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지만 당초 예상 시간 차(9분)의 3배 가까이 격차가 벌어졌다. 역사 내에서 환승 위치를 찾거나, 도서관을 코앞에 두고 점자블록이 끊겨 왔다갔다 하는 등 추가로 소요된 시간 때문이다.
‘카카오택시’ 부르니 10초컷…장애인복지콜은 한참 기다려 결국 실패
돌아오는 길에 택시 이용 요건을 비교해보자 더욱 큰 차이가 드러났다. 카카오택시 호출 10초 만에 배차에 성공한 취재진과 달리 박 씨는 비휠체어 장애인용 ‘복지콜’ 차량 배치에 실패해 대신 서울시가 지원하는 ‘바우처택시’를 16분 만에 부를 수 있었다. 박 씨는 “그나마 서울은 바우처택시가 많은 편이지만 수도권을 벗어나면 훨씬 호출이 어렵다”면서 “다만 여전히 탑승 위치를 쉽게 설명하지 못하면 기사님들이 짜증을 내거나 호출을 취소해달라고 하기도 한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씨는 지난해까지 인천에 위치한 송암점자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올해부터 한국점자교육원으로 일터를 옮겼다. 매번 복지콜이나 일반 콜택시를 불러야했던 그때보다는 출퇴근이 훨씬 쉬워졌다. 송암점자도서관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관이지만 접근성이 매우 낮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인하대역이나 송도역에 내려도 도보 26~40분이 걸린다. 아니면 제물포역에서 내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사실상 택시가 유일한 선택지인 셈이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 이동권…갈 길은 멀다
앞서 보건복지부가 진행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이행 실태 조사(2021)에 따르면 15가지 차별 금지 영역 중 ‘이동 및 대중교통수단 이용(60.3%)’에서 차별을 가장 많이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점진적으로 바우처택시 차수를 늘리고 장애인 버스 요금 예산을 확대하는 등 이동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장애인 지원 예산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단기적·시혜적 정책보다 장기적인 사회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고민이 더욱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장애인들은 이동성이 보장되지 못해 버리는 시간이 매우 크다”며 “안전하고 접근성이 보장된 교통 시스템이 매우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조한진 대구대 일반대학원 장애학과 교수는 “장애 유형에 따라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가 서로 다르다”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류장 정보를 음성으로 안내하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시각 정보를 제시하는 등 유형별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씨 역시 “역량있는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마련된다면 궁극적으로 장애인 지원 예산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