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尹·李회담에서 지속 가능한 국가경영을 논하라

2000년 의약분업 의료파업 사태 때도  
DJ-이회창 회담 갖고 ‘파업 중단’ 공감
역대 대통령, 난국 때마다 야당과 회담
尹·李, 구조 개혁·의대 증원 협의해야

고광본 논설위원·선임기자

김대중(DJ) 대통령이 평양에서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돌아온 지 며칠 만인 2000년 6월 20일 의사들은 총파업에 돌입한다. 의약분업에 반대해 전국 의원의 약 96%가 진료를 거부한다. 전공의 가운데 약 80%는 4개월간 파업 중이었다. 의료계는 8월 1일 의약분업 의무 시·행에 맞춰 무기한 파업을 선언하고 전공의의 밤샘 농성과 교수들의 진료 거부를 이어간다. 환자들의 피해가 확산되자 정부는 3507명이던 의대 정원을 4년간 10% 줄이는 당근책을 제시해 의료계와 타협한다. 의료 현장의 극심한 혼란은 11월 말에서야 마무리된다. 이로써 의사는 전문의약품 처방만 하고 약사는 임의 조제를 못하는 대신 일반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의약품 오남용으로 국민 건강이 위협받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의약분업의 성공에는 그해 6월 24일과 10월 9일 DJ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회담이 한몫했다. 의약분업에 대해 6개월간 일정 지역 시범 실시를 주장하며 어정쩡한 입장이었던 야당이 의사 파업 중단 필요성에 공감한 것이다. DJ는 여소야대 국회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 미국 9·11 테러 등 고비마다 이 총재와 7차례 회담을 하는 등 끊임없이 야당과 소통했다. 당시는 김종필(JP)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가 5개월 이상 미뤄질 정도로 야당의 발목 잡기가 심했다. 물론 이 총재 입장에서도 “몇 차례 영수회담 뒤 돌아온 것은 후회와 분노, 통탄뿐”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회담에 많은 진통이 따랐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회담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18년간 5회,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 8년간 1회 있었다. 대통령 임기가 5년으로 바뀐 뒤 노태우·김영삼(YS)·노무현 전 대통령은 각각 2회,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3회,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은 각각 1회씩 야당 대표와 만났다. YS·DJ·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은 제1야당과 원내정당 대표를 함께 초대하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야 대표 회담을 여러 차례 가졌다.


역대 대통령들은 난국에 처할 때마다 야당과 만나 실타래처럼 얽힌 국정을 풀어가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1987년 6월 국민 저항에 몰려 있을 때 YS와 회담을 갖는다. 며칠 뒤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의 6·29 선언을 수용함으로써 국면 전환을 시도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정권 출범 두 달 뒤인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자 1990년 1월 3김(DJ·YS·JP)과 연쇄 회동해 의중을 떠본 뒤 집권당인 민정당과 YS·JP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전격 발표한다. DJ만 배제한 채 공룡 여당을 만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9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회담에서 ‘대연정’을 제안했다가 ‘다시는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2년간 8차례 제안했던 회담이 조만간 대통령실에서 열린다. ‘범죄 피의자와의 회담은 부적절하다’며 다수당인 제1야당 대표와의 회담을 피하던 윤 대통령이 4·10 총선 참패 뒤 ‘정치를 하겠다’며 마음을 바꾼 것이다. 기왕 정치 지도자들이 어렵게 만나는 만큼 의대 증원과 필수·지역 의료 정상화 방안, 물가 대책은 물론 지속 가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연금·교육·노동 등 구조 개혁과 연구개발(R&D) 지원, 저출생 극복 방안 등을 심도 있게 협의했으면 한다.


어느 때보다 경제·안보 불확실성이 커진 현실에서 잠재성장률마저 1%대로 떨어지기 직전이다. 국가가 도약하느냐, 추락하느냐 기로에 서있다.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공지능(AI)·반도체·첨단바이오 등 국가전략기술 혁신 생태계에 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첨단전략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미국·중국 등의 긴박한 움직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대표는 1인당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 사과, 채 상병 특검 수용 등에만 무게를 둬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 역시 야당의 주장을 단순히 듣는 데만 방점을 두면 곤란하다. 윤(尹)·이(李) 회담이 국가 경영을 실질적으로 논하는 자리가 되지 않으면 또 다른 정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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