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청주에 20조 원 이상을 투자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세대 D램의 생산능력을 확대한다. 삼성전자,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등 경쟁사보다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HBM 기술은 물론 생산 능력까지 우위를 가져가면서 차세대 인공지능(AI)용 메모리를 장악하겠다는 포부가 깔렸다.
SK하이닉스는 24일 이사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신규 투자 안건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청주에 건설되는 M15X 팹(공장)이 신규 D램 공장으로 낙점됐다.
SK하이닉스는 당초 청주 클러스터를 낸드 생산 거점으로 육성한다는 복안이었으나 최근 AI 열풍에 따라 낸드 대신 차세대 D램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팹 건설에 들어가는 투자비만 5조 3000억 원에 이른다.
SK하이닉스는 이달 말부터 팹 공사에 착수해 2025년 11월 준공 후 양산을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장비 투자도 순차적으로 진행해 장기적으로는 M15X에 총 20조 원 이상의 투자를 집행해 생산 기반을 확충하기로 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는 “AI 메모리 시대를 맞아 회사 경쟁력의 근간인 국내 생산기지에 대한 투자를 늘려나가겠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가 이처럼 ‘통 큰’ 투자를 결정한 것은 HBM 등 차세대 메모리가 성장 사이클에 올라섰다는 확신 때문이다. 과거 범용 메모리만 생산하던 시대를 벗어나 앞으로는 주문형·최첨단 메모리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실제 HBM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우선 D램 생산능력부터 제고해야 한다는 게 반도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청주 외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한 투자도 차질 없이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용인 클러스터에 대한 투자비는 120조 원에 이른다. 현재 용인 클러스터의 부지 조성 공정률은 약 26%로 목표보다 더 빠르게 공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가 20조 원이 넘는 신규 D램 투자에 나선 것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실히 잡기 위한 결정이다. 또한 이번 생산능력 확충을 통해 향후 D램 시장 회복에 적시 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시장의 우려도 씻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낸드에서 D램 라인으로 탈바꿈=SK하이닉스의 이번 투자에는 여러 가지 노림수가 있다. 우선 HBM 분야에서 확실한 우위를 다질 수 있게 됐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쌓아서 만든 특수 메모리다. 현재 D램을 8단으로 쌓은 HBM이 범용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향후에는 두 배 이상의 D램이 HBM 제조에 쓰인다. 6세대 제품에서는 한 개의 HBM을 만들기 위해 16개의 D램이 필요할 정도다.
SK하이닉스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M15X 팹(공장)을 D램 라인으로 깔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2022년 M15X 증설 계획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낸드플래시 생산을 위한 라인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현재 SK는 청주에 있는 M11·M12·M15 등 3곳의 반도체 공장 중 낸드를 생산했던 M15 공장 바로 옆에 라인을 증설하기로 하면서 확장이라는 의미의 X를 덧붙여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낸드를 비롯한 메모리 시장이 2022년 말부터 급속히 위축된 데다 최근 들어 AI 반도체가 대세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M15 공장에 HBM 공정을 위한 실리콘관통전극(TSV) 라인을 꾸릴 만큼 경영진이 HBM 투자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설명했다.
생산능력을 보면 구체적으로 M15X에서는 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수만 장가량의 D램 웨이퍼가 생산될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반도체 호황 당시 SK하이닉스가 보유했던 D램 생산능력인 월 41만장의 4분의 1 수준이다.
또한 이 공장에는 첨단 D램을 생산하기 위한 극자외선(EUV) 노광기도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양산하고 있는 5세대 HBM(HBM3E) 제조를 위해 최첨단 D램인 10㎚(나노미터·10억 분의 1m)급 5세대 D램을 활용하고 있는데 M15X에서도 EUV 기기를 활용해 최신 HBM용 D램을 활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범용 D램 회복 선제 대응=SK하이닉스가 M15X를 D램 생산기지로 결정한 데는 HBM뿐 아니라 범용 D램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것도 있다. 그동안 업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시설에 대한 투자를 졸라맸던 SK하이닉스가 범용 D램 회복 빅사이클에 올라타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었다.
실제 AI용 서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고성능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범용 메모리에 대한 수요가 함께 폭증하면서 범용 D램 값도 올 들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PC에 범용으로 탑재되는 DDR5 제품(DDR5 16Gb 2Gx8) 고정 거래 가격은 지난해 4분기 하락세를 멈추고 전 분기 대비 17.47% 상승한 3.9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1분기에도 4.1달러까지 가격이 올랐다. 상대적으로 구형 제품인 DDR4(DDR4 8Gb 1Gx8) 제품 역시 지난해 4분기 1.6달러에서 올해 1분기 1.8달러까지 가격이 상승했다. 업계에서는 연말까지 이러한 상승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D램 제조사들은 수요 증가에 따라 제품 고정 거래가를 앞다퉈 올리며 실적 개선 기반을 준비하고 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마이크론이 D램 2분기 고정 가격을 전 분기 대비 25% 이상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이에 따라 선두권 한국 업체들의 향후 실적도 더욱 탄력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SK하이닉스는 “연평균 60% 이상의 성장세가 예상되는 HBM과 함께 서버용 고용량 DDR5 모듈 제품을 중심으로 일반 D램 수요도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도 지난달 27일 주주총회에서 DDR5 제품과 관련해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4배 이상 성장하며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