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심판론’이 표출된 4·10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야당이 압승한 뒤 한국 정치가 변곡점에 섰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처절한 반성과 전면 쇄신을 통해 외연을 확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총선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져 윤석열 정부는 국정동력 상실 위기에 처했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포퓰리즘 입법과 각종 특검 법안들을 밀어붙이며 정치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국 정치 사상 전문가인 김영수 영남대 사회과학대학장은 29일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대한민국 건국 시대인 ‘1948년 체제’와 경제성장·민주화 시대인 ‘1987년 체제’는 저물고 있는데 보수 진영이 대안을 내놓지 못해 참패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여당이 제2 건국 시대를 연다는 각오로 쇄신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위한 새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교수는 윤 대통령을 향해 “불통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개인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 비극이 벌어질 것”이라며 “독단적 인사 방식을 벗어나 공정한 시스템 인선을 하고 차기 총리 후보군도 국회의 여야 협의에 맡겨 물색하라”고 말했다.
-4·10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분노’의 감정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유권자들이 ‘르상티망(강자에 대한 약자의 복수 감정)’에 휩싸여 야당에 대거 표를 줌으로써 여당이 대패한 것이다. 분노의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치·사회 체제를 파괴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 사회의 통상적인 도덕적 가치가 크게 훼손됐다. 시민들의 상식과 도덕에 따르면 도저히 당선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이번 총선에서 당선됐다. 피의자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원색적인 막말을 했던 김준혁 민주당 후보 등이 당선돼 국회에 진출하게 됐다. 유권자들이 분노의 격정에 빠지는 바람에 ‘우리 진영이 이길 수만 있다면 출마 후보의 도덕성이고 뭐고 볼 필요 없다’는 분위기가 번진 것이다.
-이번 선거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체제 위기 변곡점’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과거 통합진보당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것은 대한민국 체제 위기의 경고음이다.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정당 결정을 받고 해산된 통진당은 종북 세력으로 평가받았던 집단이다. 우리나라의 정통 야당인 민주당이 연합 정치의 형태로 그런 정당 출신 인사들을 받아들여 제도권 정치에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직면한 체제 위기 변곡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
△한국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게 되기까지 두 모델이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건국 세대가 주도한 ‘1948년 체제’와 제6 공화국을 출범시킨 ‘1987년 체제’다. 1948년 체제는 산업화를 이룬 시기와 겹친다. 1987년 체제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정치적 대타협을 이뤄 총성 없이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시기다. 두 세력이 대화를 통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헌법을 만들었다. 이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인 1990년 3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보수대연합’을 내세워 합당하고 ‘보수적 민주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어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DJ) 후보와 김종필(JP) 후보가 단일화하는 ‘DJP연합’을 이뤄 집권함으로써 보수적 민주화를 기반으로 한 1987년 체제가 완성됐다. 이 시기의 정통 야당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것은 우리나라 정통 야당의 기본 정체성으로 확립됐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학생 운동권, 노동 운동권 세력들과 연합해 집권한 뒤 보수적 민주화의 정체성을 허물기 시작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아예 ‘적폐 청산’을 내세워 이것을 뒤집으려 했다. 이번에는 통진당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민주당의 위성정당을 통해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1948년 이래의 금기가 깨졌다.
-1948년 체제, 1987년 체제가 막을 내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1997년 외환위기로 빚어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여파로 중산층으로 오르는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가 끊기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빚어졌다. 그 직격탄을 맞은 세대가 지금의 40~50대 연령층이다. 이들은 1987년 체제를 통해 이룬 보수적 민주화가 자유는 줬으나 빵을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의구심이 이 세대를 진보 진영의 아성으로 만들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같은 인사들이 ‘제2 촛불 혁명’을 부르짖었고 야권의 강성 지지층은 ‘이 대표가 대통령직에 올라 문재인 정부에서 실패한 촛불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윤 대통령을 끌어내리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보수적 민주화를 이룬 1987년 체제를 끝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길은 독단적 개헌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유’를 삭제하는 길로 이르게 된다.
-보수 정치 세력이 어떻게 쇄신해야 재건할 수 있는가.
△1987년 체제의 보수적 민주화가 해소하지 못한 계층 양극화 문제 등을 풀기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1948년 체제와 1987년 체제에 이르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으므로 제2의 건국 시대를 연다는 각오로 자유민주주의 등을 발전시킬 새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보수 진영에서는 새 비전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대해 향수를 느끼며 산업화 시대의 그림에 다시 주목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그림이다. 보수 세력이 대안 마련에 주춤한 사이에 민주당 진영 등은 ‘보편적 복지’ ‘기본 소득’ 보장 등을 내세우며 포퓰리즘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표를 선점해버렸다. 그러나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돈을 살포하면 나라 살림이 버티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다 같이 재정을 털어서 나눠먹고 모두 함께 죽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또 제2 촛불 혁명론처럼 분노의 감성에 호소한 정치로 기성 체계를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나라와 경제를 재건할 수는 없다. 한계 지점에서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대안을 내놓는 것에 보수정당 재건의 답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안이 있는가.
△예를 들어 ‘경제민주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시장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취약 계층 등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국가가 나서서 보완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 등이 이야기하는 보편적 복지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 복지가 필요한 계층에 정부가 충분히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선별적 복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보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기업들도 이윤 추구를 넘어서 부의 양극화, 계층 사다리 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갈 것이냐에 대해 고심하고 사회적 대타협에 나서야 할 때다.
-여당 참패에 대해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견해인데.
△윤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가장 문제다. 국민의 눈에 비친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오만과 불통이었다. 정부 각료들과 대통령실 참모들이 직언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지난해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상황을 오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총선 패배를 계기로 윤 대통령이 진심으로 대오각성하고 통치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인사에서도 대통령이 공직을 사유물처럼 배분한다는 비판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이를 해소하려면 공정한 시스템 인사를 복원해야 한다. 주요 공직 후보군을 보텀업(bottom up) 방식으로 추천받되 대통령비서실장과 인사 관련 비서관 등을 중심으로 시스템에 따라 검증하려면 해당 후보군 중에서 대통령의 최종 인선이 이뤄져야 한다. 새 총리 인선도 국회에 맡겨 여야가 협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새 총리 인선의 메시지는 ‘협치와 균형’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온건한 노선을 추구하는 인물, 양극단 정치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감을 갖춘 인물이 총리로서 적합하다.
-야당이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검, 김건희 여사 특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겨냥한 특검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윤 대통령은 현재 거론되는 야당의 특검 공세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상 다른 방법은 없으므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 특검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국정운영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이 직접 공개 석상에 나서서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그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면 국민들도 이해해줄 것이다.
-민주당은 4·10 총선 승리 후 포퓰리즘 입법 폭주에 더 나서는 등 양극단 정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이 4·10 총선 과정에서 ‘비명계 학살’ 공천으로 친명계 독주의 길을 열었다. 이 대표가 이처럼 독단적인 정치를 계속하면 차기 대통령직에 오르기 어려울 것이다. 이 대표는 과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실패 사례를 되새겨보길 바란다. 우리 국민들은 리더십을 가진 정치 지도자를 갈망하지만 ‘왕 노릇’을 하려는 지도자는 싫어 한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전횡하려는 인물을 국가 지도자로 뽑아주지 않는다.
◆He is…
1960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고를 나왔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사상·비교정치 등을 전공했으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한국정치사상학회 총무이사, 한국정치학회 편집이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