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정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나이가 지긋한 여성 수십명 등 5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1일부터 이곳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의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는 적지 않은 작가들도 모였다. 천경자, 나혜석만큼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무형문화재 최유현을 비롯해 송영인, 정영양 등 실과 바늘로 세상과 소통하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한 장을 장식한 ‘자수작가’들이다.
‘자수’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대개 비슷한 장면을 상상한다. 담소 나누며 수를 놓는 조선시대 양반 가문 여인들의 모습이다. 자수는 19세기까지 양반가 규수의 취미 생활 정도로 여겨졌다. 그들이 제작한 작품은 당대의 다른 예술 작품과 동등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일상 용품 정도로 저평가 됐다. 전통자수와 근현대회화를 결합하며 자수의 현대화에 기여한 박을복(1915~2013)이 자수 박물관을 개관하긴 했지만, 동시대를 살다 간 다른 미술 작가들처럼 크게 명성을 떨치진 못했다. 자수는 예술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근현대를 살다간 수많은 자수 작가들도 무명으로 사라져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근현대 미술의 대가 장욱진 회고전이 끝난 덕수궁관을 ‘자수 작품’으로 채운 이유다. 관람객은 이번 전시에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필드 자연사박물관, 일본민예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 국내외 60여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근현대 자수, 회화, 자수본 170여 점, 아카이브 50여 점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주변화된 자수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하며 진화했는지 4부에 걸쳐 선보인다. 1부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제작된 ‘전통 자수’를 볼 수 있다. 전통자수는 생활자수, 복식자수, 각종 의례 및 병풍 등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제민의 ‘자수 지장보살도(1917)’가 사찰 밖으로 나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자수 지장보살도’는 간소해진 20세기 불교 그림 경향을 드러낸 작품이다.
2부 ‘그림 갓흔 자수’에서는 본격적으로 ‘여성 혁명’의 도구가 된 자수 실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많은 한국 여성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자수를 전공했다. 2부에서는 박을복, 나사균 등 유학파들의 자수 습작과 밑그림 등을 소개하며 자수 공예품이 회화같은 면모를 나타내며 미술 작품의 반열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윤봉숙의 작품 ‘오동나무화 봉황(1938)’이 대표적인 사례다.
3부 ‘우주를 수건으로 삼고’에서는 광복 이후 아카데미 안에서 진행된 소위 현대공예로서 자수의 면모를 살펴본다.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수과가 신설됐고, 1950년대 이후 이대 출신 작가들이 일본 유학파들의 자리를 대체한다. 이 중 송정인의 ‘작품A(1965)’는 자수를 통해 추상이라는 새로운 조형 언어를 적극 수용한 작품이다.
마지막 4부 ‘전통미의 현대화’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 80호 자수장인 한상수의 ‘궁중자수 모란도 병풍(1978)’과 1996년 국내 두 번째 자수장으로 지정된 최유현의 ‘팔상도(1987~1997)’ 등 전통을 계승 하면서도 자수의 현대화를 고민한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자수는 일상 용품, 산업공예에서 보존해야 할 전통문화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시는 8월 4일까지.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