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대가 ‘광기의 시대’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시대의 소설가’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조성기(74·사진)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남기기까지 육십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우리 시대의 소설가’를 비롯해 ‘우리 시대의 무당’, ‘우리 시대의 법정’ 등 ‘우리 시대의’ 시리즈를 망라했지만 정작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그에게 큰 숙제였다.
조 작가는 지난 달 30일 ‘아버지의 광시곡’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다”며 " 오랫동안 저를 눌러왔던 두 개의 권위가 내려앉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두 개의 권위는 아버지와 그 시대다.
자전적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박정희 시대’다. 조 작가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당시 교사였던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 부산지역 교원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육군형무소에 잡혀간 것. 6개월 후 아버지가 출감했을 때 사회적 역할을 상실한 아버지는 어린 조성기의 눈에는 그저 알코올중독자였다.
조 작가는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욕설을 막으며 아버지의 취한 몸을 질질 끌고 올 때면 너무 괴로워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게 소원이었다”며 “그때는 알코올중독자로만 여겨졌던 아버지가 했던 교원노조 운동이 한국 노조운동의 효시가 됐다는 것도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새롭게 평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교원노조에 열중하게 된 데는 1960년 3·15 부정 선거 당시 정부의 지시로 교원들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투표함 교체, 5인조 투표, 참관인 매수 등 부정 선거의 하수인으로 앞장섰다는 자괴감에서였다. 아버지는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가지에 매달렸다. ‘사법고시(사시)’였다. 경기고에서도 곧잘 1등을 하던 아들이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을 때도 수석 합격이 아니라는 말에 핀잔을 줬다. 기독교에 푹 빠져 사시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입고 있던 러닝 셔츠를 찢으며 포효했다. “독학으로 고시에 도전한 나도 있는데 넌 비겁한 놈이야.”
실제로 아버지는 고집처럼 1972년까지 매년 사시를 치렀다. 조 작가는 “그때는 내 길을 간다고 고집했지만 자식을 키워보니 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 같다”며 “그리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엇갈려 양가적인 감정이 있다”고 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분노로 살아가던 아버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지 세 달이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박정희라는 두 개의 권위가 무너진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내린 아버지의 인생의 정의는 ‘광시곡’이다. 미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시대에 대한 회환과 화해이기도 하다. 조 작가는 “‘서울의 봄’ 영화를 20대 젊은이들이 즐기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며 “역사적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수렴이 되면서 공통점을 느끼면 즐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