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역내산 재료를 사용하면 해당 재료를 국내산으로 인정해주는 ‘원산지 누적 인정’ 제도가 적용된다. 회원국의 중간재를 사용하면 원산지 기준 충족이 쉬워 공급망을 강화하는 효과가 뚜렷하다. 특히 CPTPP는 시장 개방 수준이 높고 우리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지 않은 멕시코와 신규로 FTA를 체결하는 간접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CPTPP 가입과 개별국과의 협정 투트랙으로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가 호주와 베트남 등 일부 국가와의 개별 공급망 협상을 추진하고 있지만 또 다른 축인 CPTPP 가입은 10월 각료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기약이 없다. 지난해 7월 뉴질랜드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는 영국이 가입 서명을 했다. 그만큼 한국도 이번 회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상황은 1차로 제22대 국회를 장악한 거대 야당 탓이 크다. 4월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을 꺾고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는 2022년 4월 당시 CPTPP 추진에 따른 시나리오별 영향 분석이 충분하지 않다며 정부에 보완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국회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퇴짜 통보였는데 당시 정책위의장은 현재 산중위 야당 간사인 김성환 민주당 의원이다. 3선에 성공한 김 의원은 22대 국회에서 산중위원장 유력 후보로 자천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총선 이후 추진 동력을 상실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통상조약의 체결 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통상 협상을 개시하기 전 국회 소관 상임위인 산중위에 관련 내용을 보고해야 한다. 상임위 의결 사항은 아니지만 국회 보고를 건너뛰고 가입 신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정부 내에서도 선거가 끝난 뒤 무기력증이 팽배하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만 해도 지난달 22일 사이토 겐 일본 경제산업상과의 회담에서 일본 주도의 CPTPP 가입에 대해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양국이 통상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협력하자는 공감대가 있었음에도 CPTPP 같은 개별 이슈에 대해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셈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곧 발표할 신산업정책(신통상정책)의 두 축이 반도체 공급망 강화 같은 경제안전보장정책과 CPTPP의 외연 확대임에도 나온 결과다. 외교가의 고위 관계자는 “일본 내에서는 CPTPP에 가입해야 할 핵심 국가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며 “그 나라는 바로 한국”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 역시 “(총선 결과) 윤석열 정부는 CPTPP를 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한국의 CPTPP 가입이 국회에 가로 막혀 있는 것과 달리 주요국은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자원 부국인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는 1일(현지 시간) “CPTPP의 30개 조항을 분석한 결과 인도네시아의 기존 규칙과 약 70%가 일치하는 내용”이라며 “가입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올해 의장국인 캐나다는 “CPTPP의 외연 확장을 위한 효과적인 가입 경로 개발에 나서겠다”고 한 상태다.
국제통상 전문가들은 경제 안보가 위협 받는 상황에서 야당의 전향적인 태도를 주문했다. 산업부와 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주요국의 지역무역협정(RTA) 체결 건수는 유럽연합(EU)이 47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한국(22건), 일본(21건), 미국(20건), 중국·호주(18건), 캐나다(16건) 순이었다. 한국이 건수로는 뒤지지 않지만 CPTPP처럼 공급망 안정과 시장 확대에 필수적인 협정에 가입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CPTPP가 기업 친화적인 누적 원산지 규정을 두고 있어 지금과 같이 통상 질서가 불안정할 때 굉장히 유익하다”며 “총선도 끝났으니 국회도 빨리 상임위에서 보고를 받아 정부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준이 아닌 무역협상 시작 때는 국회 보고를 사전이 아닌 사후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도 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협정을 인준하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적인 발목 잡기를 피하려면 사후 보고식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사전 보고가 생긴 건 한미 FTA 등 일방적이고 사후 통보성 통상 협상에 따른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면서도 “야당도 간접적이나마 통상협정의 책임 있는 일원인 만큼 사전 보고를 거부하는 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