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다시보기] 운명과 사랑

심상용 서울대학교 미술관장

피에르 보나르, 정원의 젊은 여인(르네 몽샤티와 마르트 보나르), 1921-46, 캔버스에 유채, 60.5x77cm

1893년 피에르 보나르는 우연한 기회에 운명의 여인 마르트와 마주했다. 그 만남으로 그의 예술은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했다. 보나르는 평생 그녀의 주변을 서성였다. 그녀가 목욕을 즐겼던 욕조와 커피를 마시던 식탁, 거울과 마주했던 화장대에서 그의 이젤이 멀리 떨어지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보나르 회화의 톤과 색채·분위기에 이르는 모든 것이 그녀의 존재성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적이고 은밀한 경계 안의 것들에 대한 애착, 보나르의 내면주의, 즉 앵티미슴 미학의 핵심이다.


그런 보나르였지만 한때 그의 모델이었던 르네 몽샤티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마르트는 질투했다. 결국 보나르는 이별을 통보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로 르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마르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보나르는 이전에 완성했던 그림 한 점을 꺼내어 고쳐 그렸다. 마르트 옆에 르네를 추가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풀밭의 녹색 말이야. 잘 어울리지 않아. 노란색이 필요해.” 자신이 그린 ‘꽃이 핀 아몬드나무’를 보면서였다. 보나르는 늘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고쳐 그리곤 했다. 갤러리에 이미 전시된 그림에 주머니에서 붓과 물감을 꺼내어 다시 색칠한 적도 있었다. 이미 크로키를 할 때부터 심사숙고를 거듭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내내 고쳐 그리기를 반복했다. 사물이 너무 강조되거나 마치 존재하는 사실처럼 돼 우리 눈이 세상을 발견하는 자유와 가능성을 방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수정을 가하면서 색채를 입혔다가 다시 없애고, 없앤 자리에 다시 색을 입히면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진실을 위해 수많은 작은 거짓말을 거쳐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또는 진실은 늘 오류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나가는 것이 바로 회화라는 것을 선언이라도 하듯 그림을 그렸다. 마르트만 있었던 자리에 르네를 그려 넣을 때 사랑에 대한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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