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7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E)를 기존 계획보다 1년 앞당긴 2026년에 양산한다. 6세대(HBM4) 제품 양산 발표는 물론 차차세대 제품의 양산 시기까지 당초 로드맵보다 더 빠르게 생산하겠다는 전략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제조사들이 고도화한 HBM을 더욱 빠르게 공급받기를 원하고 삼성전자·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라이벌 회사들이 SK하이닉스의 시장 지배력을 바짝 추격해오면서 개발 속도를 더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13일 김귀욱 SK하이닉스 HBM선행기술팀장은 서울 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IMW 2024’ 연사로 나서 이같이 밝혔다.
김 팀장은 회사의 HBM 기술 로드맵이 담긴 장표를 보여주면서 “4세대(HBM3) 제품까지는 2년 주기로 개발되던 신제품이 2024년 5세대(HBM3E) 제품 이후 1년 주기로 단축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HBM4E는 제품 스펙이 눈에 띄게 개선된다. SK하이닉스는 HBM4E에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처음으로 HBM 제조에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BM3E와 HBM4까지는 10나노급 5세대(1b) D램을 활용해 만들었는데 올해 하반기부터 6세대 D램을 본격 양산한 후 자연스럽게 차차세대 HBM에도 적용한다는 전략이다. D램 속 기억장치의 수가 늘어나면서 HBM의 전체 용량도 크게 늘어날 수 있다. HBM4E의 구체적인 단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HBM의 가장 아래에서 각종 연산을 조율하는 베이스 다이 기능도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4월 SK하이닉스는 세계 1위 파운드리인 TSMC와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고 HBM4에 들어가
는 베이스 다이를 함께 만들기로 했다. HBM4에는 TSMC의 7㎚(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공정으로 만든 베이스 다이가 장착될 것으로 보이는데 HBM4E에서는 한층 더 정교한 공정으로 만든 칩을 장착할 가능성이 크다.
김 팀장은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하이브리드 본딩’ 공정은 HBM4 이후에 적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하이브리드 본딩 공정은 현재 SK하이닉스가 HBM 제조에 활용하고 있는 매스리플로우 몰디드언더필(MR-MUF)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공정이다. 칩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범프를 없애는 기술로 HBM의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더 많은 D램을 적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HBM4에서 주력 공정인 MR-MUF는 물론 하이브리드 본딩도 연구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 방법은 수율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에 MR-MUF용 본더를 공급하는 한미반도체 등의 수혜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또 “고객사가 미래에 20단 이상 쌓은 제품을 요구했을 때는 두께의 한계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공정을 모색해봐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의 발표 내용 외에도 SK하이닉스는 올해 차세대 HBM 양산 로드맵을 앞당기고 있다는 점을 지속 강조하고 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는 2일 이천 사업장에서 개최된 기자 간담회에서 12단 HBM4의 양산 시기는 기존 2026년에서 1년 앞당긴 2025년이 될 것이라고 처음 발표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가 HBM 생산 시점을 크게 앞당기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AI 반도체 회사들이 더 발전된 형태의 HBM을 더 빨리 공급받고 싶어한다. 최근 생성형 AI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기존 HBM보다 더 큰 용량과 속도가 필요해진 상황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 굴지의 AI 반도체 제조사와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자체 칩 개발에 나선 빅테크 고객사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러한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추격도 의식했다. 지난해 SK하이닉스는 HBM3을 엔비디아에 단독 공급할 정도로 독보적인 시장 우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내년 HBM4를 양산하겠다며 SK하이닉스를 바짝 쫓기 시작했고 회사는 이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로드맵을 수정했을 것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HBM 2위인 삼성전자는 기술 안정기에 접어들면 엄청난 물량 공세를 벌이면서 단숨에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며 “SK하이닉스는 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차세대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고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