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농협은행이 ‘절대 강자’의 위상을 지켜온 금고 시장에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교육청·지방자치단체 등 주요 정부 기관들이 금고 운영을 담당할 금융기관을 선정할 때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성과를 반영하는 추세기 때문이다. NH농협은행은 그동안 금고 유치 경쟁에서 많은 점포 수를 내세워 강세를 보여왔지만 ESG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열세여서 앞으로 금고 유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19일 교육계에 따르면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교육청 금고 지정 및 운영에 관한 조례’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해당 안에 따르면 연간 10조 원대의 서울시교육청 자금을 운영할 금고를 선정할 때 금융기관의 녹색금융 이행 실적과 관련한 평가 항목이 별도로 신설된다.
국제 녹색금융 이니셔티브 가입 현황과 ESG 채권 발행 금액 등을 비교·평가한 후 금융기관별 순위에 따라 점수를 부여한다. 금고 선정 때 녹색금융 실적을 별도 평가 기준으로 두는 것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가운데 서울이 처음이다.
시교육청의 예산은 올해 기준 11조 1605억 원으로 경기도교육청(21조 9939억 원)에 이어 전국 두 번째 규모다. 그동안 금고 운영 기관을 선정할 때는 △금융기관의 신용도와 안정성 △대출·예금 금리 △이용 편의성 △금고 업무 관리 능력 △교육기관 기여 등 5개 분야에 초점을 맞춰 평가해왔다. 하지만 앞으로 4년간 금고를 운영할 금융기관을 선정하는 이번부터 100점 만점에 1점을 ESG 실적 점수로 배정한 것이다. 1~2점 차로 금고 유치 당락이 갈리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변수다. 대신 ‘이용 편의성 및 관내 지점 수’ 배점을 기존 20점에서 19점으로 줄였다.
60년 넘게 시교육청 금고지기를 도맡았던 NH농협은행에는 비상이 걸렸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발간한 ‘2022 화석연료 금융 백서’에 따르면 NH농협은행은 2022년 6월 기준 국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중 가장 많은 1조 6301억 원을 석탄 금융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교육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시교육청의 평가 지표와 배점은 녹색금융 이행 여부를 평가하는 데 변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단순 탄소 중립 선언을 넘어 실질적인 석탄 발전 투자 등을 평가하기 위해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시를 비롯한 전국 66개 광역·기초자치단체는 올해 말 금고 은행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ESG 성과 가점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 서울시는 앞서 2022년 ‘녹색금융 이행 실적’을 금고 선정의 새 평가 지표로 추가했다. 광주광역시도 지난달 ‘지역사회기여’ 항목에 녹색금융 이행 실적을 포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융권에서는 이런 변화가 금고 유치 경쟁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국내 5대 시중은행 가운데 전국 지자체와 금고 계약을 가장 많이 맺은 곳은 농협은행(187개, 주·부금고 포함)이고 신한은행(27개), KB국민은행(19개), 우리은행(17개), 하나은행(14개) 순이다. 지자체 등의 금고 자금은 고금리 상황에서 은행이 조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저원가성 자금이다. 그만큼 수주 경쟁도 치열하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올해부터는 금고 유치 경쟁에서 NH농협은행이 절대 강자로 자리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그동안 ESG에 꾸준히 투자해온 금융기관들이 금고 유치 경쟁에서 앞선다면 금융권 전체로 ESG가 확대되는 효과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조례개정 최종안과 금고 추진 일정 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