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결과는 달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이더리움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은 예상을 깬 정치적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가상자산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자 미국 민주당도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는 게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남성과 젊은 층 표를 잃을 가능성을 고려해 이더리움 현물 ETF를 승인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임민호 신영증권 연구원은 24일 “SEC가 이더리움 현물 ETF에 대한 입장을 단기간에 뒤집은 것은 정치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며 “이더리움 현물 ETF 승인이 바이든 정부의 정치적 입장이 바뀐 결과라면 미국의 가상자산 정책은 좀 더 산업에 우호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가상자산 정책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앞서 가상자산 현물 ETF 발행·상장·거래 허용은 물론이고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편입할 수 있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민주당은 금융위원회에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한 유권 해석을 재요청할 방침이다.
금융 당국 차원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14일 게리 겐슬러 미국 SEC 의장과 만나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배경 등을 청취하고 로스틴 베넘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의장과도 만나 가상자산 입법 동향을 논의했다. 구체적인 논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국내외 제도 현황 등을 살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원장은 비트코인 현물 ETF 도입 여부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는 올 3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비트코인 현물 ETF가 도입되려면 가상자산 관리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며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으로 제도권에 들어오는 시점에 맞춰 하반기께 공론화의 장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가상자산 1단계 법안으로 불리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올 7월부터 시행되고 이어 가상자산 산업 육성을 다루는 2단계 입법 논의도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맞춰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편입하는 방안이 논의될 수 있다.
다만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금융위는 올해 1월 비트코인 현물 ETF를 발행하거나 중개하는 것은 기존 정부 입장과 자본시장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기초자산에 가상자산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만큼 이더리움 현물 ETF 역시 발행이나 거래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날 금융위 관계자는 “가상자산 현물 ETF 관련 사안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면서도 “미국 SEC가 이더리움 ETF를 승인했다고 기존 입장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금융위가 가상자산 현물 ETF에 유독 부정적인 이유는 밸류업 정책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어서다. 가상자산 현물 ETF를 허용하면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나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으로 쉽게 투자할 수 있는 만큼 많은 투자자들이 새롭게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자산운용사들도 관련 상품을 적극 출시하면 증시에 머물던 자금이 가상자산 시장으로 급격히 쏠릴 가능성이 있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면 개인투자자의 코스피 주식 순매수가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만큼 정부는 증시 밸류업이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금융위 일각에서는 만약 가상자산 현물 ETF를 승인하더라도 증시에 영향이 없는 시기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비트코인 가격 변동성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의 5배, 코스피 4.5배 정도로 높은 만큼 작은 유동성 변화에도 큰 충격이 나타날 가능성도 걱정거리다. 특히 예금 잔액 변동성을 확대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경우 은행 유동성 관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박윤철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물가와 경기 간 논쟁이 지속될수록 유동성에 민감한 가상자산 변동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장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달 ‘가상자산 현물 ETF의 리스크’ 보고서에서 “가상자산 혁신성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실제 유용성을 입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고 각국 시장 규율이 정립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충분한 평가가 이뤄진 후 현물 ETF 출시 여부와 관련된 제도적 검토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