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위기를 겪고 있는 반도체 사업의 구원 투수로 등장하면서 그의 과거 리더십이 재조명받고 있다. LG 출신임에도 메모리사업부를 이끄는 사장 자리에 오르며 ‘룰 브레이커’ 행보를 시작했고 삼성SDI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후엔 신속하게 회사 체질 개선을 이끌었다. 적기 판단을 통한 ‘자사주 투자 이력’에도 이목이 쏠린다.
전 부회장에 대한 묘사에선 ‘촉이 좋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전 부회장의 ‘자사주 매직’이 대표적이다. 2017년 전 부회장은 삼성SDI 대표이사로 취임한 직후 책임경영의 일환으로 삼성SDI 주식 5000주를 주당 13만 7973원에 사들였다.
당시 삼성SDI는 갤럭시노트7 배터리 발화 사건으로 쓴맛을 보면서 주가가 사상 최저점 수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해 1분기까지 6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전 부회장 취임 직전인 2016년의 영업손실이 1조 원 규모에 가까울 정도였다. 적자의 늪에 빠진 삼성SDI 실적 부진은 그룹 내에서도 골칫거리일 정도였다.
취임 직후 전 부회장은 스마트폰 배터리 위주였던 사업 영역을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중대형 중심으로 전환하며 공격적인 체질 개선을 시도한다. 그 결과 취임 당해 2분기부터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2018년에는 영업이익을 7000억 원대까지 끌어올렸다.
이 같은 체질개선 덕분에 2016년 말 10만 원 선이었던 삼성SDI 주가는 2021년 한때 사상 최고치인 80만 원대를 넘나들었다. 지난 24일 종가(40만 1000원) 기준으로 비교해 봐도 주식 매입 당시 6억 8900만 원이었던 평가액은 20억 5000만 원까지 3배 넘게 늘어난다.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에 선임되면서 삼성SDI 이사회 의장을 내려놨던 지난해 연말 이후에도 해당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
‘추진력’과 ‘실리’도 반도체 업계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전 부회장의 성향이다. D램 회로 선폭이 80나노 수준이던 2000년대 중반,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내부에선 반도체 설계를 간단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양산 과정에서 어려움을 덜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전무였던 전 부회장은 “제조를 위해 설계의 기본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맞섰다고 한다. 의견 차이를 두고 고위 임원들과의 마찰도 없지 않았지만 전 부회장은 끝까지 소신대로 D램 개발 방향을 이끌어나갔다. 80나노에서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서 20년을 지나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D램 제품의 선폭은 10나노대 수준이다.
과도한 절차 없이 실리를 챙기는 업무 방식도 유명하다. 화려한 형식으로 구성된 보고보다는 깔끔하고 요점만 담긴 보고를 선호했다. 지나치게 겉치레한 보고가 올라오면 돌려보내는 경우도 수두룩했다는 후문이다. 대신 보고에 담긴 숫자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잘못된 수치가 적혀있거나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데이터가 보고에 담긴 경우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직접 해외 거래선 관계자를 대상으로 영업에 나설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평도 나온다.
그 결과 전 부회장은 외부 경쟁사(LG) 출신 인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메모리사업부장을 맡은 데 이어 사장 자리까지 맡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 이번 인사 역시 경영 현장을 떠났다가 다시 경영진으로 발탁됐다는 점부터 시작해 '60세 퇴진 룰'까지 과감히 깨뜨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전 부회장은 기술통이라는 이력과 한 번 마음먹는 것은 밀어붙이는 추진력 면에서 삼성 반도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