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경부암 백신, 남자는 왜 맞냐고요?” 전문의 의견은 [헬시타임]

HPV 백신, 자궁경부암 외에 구인두암·항문암 등도 유발
성관계 통해 HPV 전파…남녀 모두 접종해야 예방효과
의료 선진국들은 남녀 모두에 9가 HPV 백신 접종 지원
한국은 여성 청소년에 2·4가 HPV 백신 접종 지원에 그쳐

이세영 중앙대병원 이비인후과 교수가 27일 한국MSD가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가다실9의 국내 출시 9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표 중이다. 사진 제공=한국MSD

“이비인후과 의사가 왜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을 강조하는지 궁금해들 하시더라고요. 그 또한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에 대한 편견 때문일 겁니다. ”


이세영 중앙대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27일 한국MSD가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가다실9의 국내 출시 9년을 맞아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남성의 HPV 관련 암 및 질병이 증가하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질병 부담과 삶의 질 저하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짙다”며 이 같이 말했다.


국제인유두종협회(IPVS·International Papillomavirus Society)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암의 5%는 HPV가 원인이다. 1970년대에 HPV 감염과 자궁경부암의 관계가 처음 확인됐고, 1985년 두경부암 조직에서 HPV가 검출되는 등 관련 연구 결과가 하나둘 쌓이다 보니 이 같은 파급력이 확인됐다.


HPV는 여성암으로 잘 알려진 자궁경부암 뿐 아니라 구인두암·항문암·질암 등을 남녀 구분 없이 유발한다. 구인두암·두경부암은 이비인후과에서 진료하는 대표적인 암종이다. 이 교수와 같은 이비인후과 전문의 입장에선 HPV 백신 접종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힘들다. 2018년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분마다 1명 꼴로 HPV 관련 암을 진단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HPV는 성관계를 통해 성별에 상관없이 파트너에게 전파된다. 즉, 남녀 동시 접종해야 HPV로 인한 암과 질환 예방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가장 많은 9가지 HPV 혈청형 포함하는 ‘가다실9’ 男 접종 지원은 요원

한국MSD가 지난 2016년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허가를 받은 ‘가다실9’은 HPV 백신 중 유일한 9가 백신이다. 200가지가 넘는 HPV 유형 중 고위험군인 16·18·31·33·45·52·58형과 저위험군인 HPV 6·11형 등 가장 많은 혈청형을 포함하는 데다 자궁경부암·항문암 외에 생식기 사마귀·외음부암·질암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무료접종을 시행하겠다고 지목했던 백신이기도 하다.



OECD 국가 중 HPV 백신을 국가필수 예방접종으로 포함한 국가들. 사진 제공=한국MSD


정부는 자궁경부암 예방을 위한 백신 접종의 중요성을 인식해 2016년부터 만 12~17세 여성 청소년 대상으로 HPV 백신의 무료 접종을 지원하고 있다. 이후 12~17세 여성 청소년과 18~26세 저소득층 여성까지 지원 대상을 넓혔다. 그러나 9년이 지난 현재까지 남성 청소년에 대한 지원은 요원하다. 여성 청소년 등에 지원하는 백신도 9년째 최신 제품인 가다실9이 아니라 혈청형이 적은 ‘가다실’(4가)과 ‘서바릭스’(2가) 2종에 머물러 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 38개국 중 33개국이 남성 청소년에 대한 HPV 백신 접종을 지원한다. 이 중 28개국이 최신 HPV 백신인 ‘가다실9’을 도입했다. 성관계를 통해 HPV가 여자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유럽암기구(The European Cancer Organization)는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남녀 청소년 모두 HPV 백신 접종을 권장했다. 오는 2030년까지 90%의 남녀 청소년을 대상으로 HPV 백신의 접근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런 세계적 추세와 비교하면 한국의 HPV 백신 지원 정책은 한참 뒤쳐져 있는 셈이다.



◇ HPV 백신, ‘비용효과성’ 입증…“남녀 모두에 9가 백신 접종 시급”

‘가다실9’의 국가 필수예방접종(NIP) 사업 도입이 더딘 데는 가격 문제가 주효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서울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최신 HPV 백신인 ‘가다실9’의 1회 평균 접종가는 22만 원 상당으로 현재 NIP에 포함된 ‘가다실(4가)·서바릭스’보다 7만~8만 원 가량 비싸다. 9가 백신으로 전환해 2~3회 접종을 완료하려면 그만큼 차액 부담이 늘어나는데 접종 대상마저 확대하려니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 컸다. 질병관리청이 지난 2018년 HPV 백신의 남성 청소년 접종을 지원할 경우 비용효과성을 평가하기 위해 시행한 1차 연구에서 ‘비용 대비 효과적이지 않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작년 말 질병관리청이 시행한 ‘국가 예방접종 도입 우선순위 설정 및 중장기 계획 수립 연구’ 결과 HPV 9가 백신 도입 및 대상 확대의 타당성이 입증되며 당위성이 마련됐다. 정부가 예산 부담을 이유로 더이상 버틸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 교수는 국가 차원의 HPV 접종 지원을 3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HPV 2가·4가 백신을 여성 청소년에게만 접종하면 1단계, HPV 2가·4가 백신 접종 대상을 남성까지 포함시키면 2단계, HPV 9가 백신을 남녀 모두에게 접종하면 3단계다. 이 기준 대로라면 한국은 9년째 1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 HPV가 자궁경부암 유발? 남성에 더 치명적인 암 발생에도 영향

이 교수는 남성의 HPV 질병 부담이 과소평가돼 온 이유로 HPV 관련 남성 암의 대표격인 구인두암 진단이 어려운 점을 꼽았다. HPV가 남성 암의 원인이라는 인식이 부재한 데다 생식기사마귀 등 남성에게 호발하는 HPV 관련 질환으로 인한 삶의 질 저하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탓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고스란히 HPV 관련 질병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적극적인 HPV 예방사업을 펼쳐온 호주는 2020년 남성의 HPV 백신 접종률이 78%에 달했다. 영국은 만 9세에 1회 접종을 시작한 비율이 남녀 평균 60~70%(2022-2023년 기준)로 집계됐다. 그에 비해 국내 남성 HPV 예방률이 한 자리수에 머물러 있다. 공교롭게도 HPV 관련 암의 남성 유병률은 증가하는 추세다. 대한이비인후과학회 발표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구인두암의 일종인 편도암 발생률은 2002년부터 2019년까지 3배 증가했다. 미국은 남성의 HPV 관련 구인두암 발생률이 이미 여성 자궁경부암 발생률을 앞섰다. 선진국의 질병 유형을 닮아가는 한국도 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HPV 감염이 정자 수 및 정자 운동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됐다. HPV 감염 남성의 정자 수 및 운동성에 이상을 보인 반응(75%)은 HPV 미감염 남성(43.8%)보다 30% 이상 높았다.



◇ 질병관리청, 내년도 HPV 9가 백신 도입·남성 청소년 접종 추진

질병관리청은 현재 여성 청소년에게만 지원하는 HPV 백신 예방 접종을 내년부터 남성 청소년에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HPV 백신 대상을 남녀 청소년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담은 내년도 예산안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공약이었던 ‘가다실9’을 NIP에 포함시키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부처별 예산안이 제출되고 기재부 내부 심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되는 만큼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질병청 관계자는 “작년 12월 ‘국가 예방접종 도입 우선순위 설정 및 중장기 계획 수립 연구’를 통해 도입 타당성이 확인된 인플루엔자 대상 확대, 고령층 폐렴구균(PCV13) 백신 도입, HPV 9가 백신 도입 및 대상 확대, 고령층 대상포진 백신 도입 등을 관련 부처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추진해갈 예정”이라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뒤쳐진 HPV 백신 지원 정책이 더이상 늦어지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자칫 예산이 깎여 3번 맞아야 하는 HPV 백신의 접종 횟수를 제한하거나 최신 백신을 도입하는 대신 가격이 싼 기존 백신을 남성에게 맞히는 등 ‘생색내기 정책’이 이뤄져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OECD국가를 포함한 전세계 86개국은 남녀 모두에게 HPV 백신 접종을 국가에서 지원한다”며 “적극적인 HPV 예방이 우리 미래 세대의 건강과 국가 보건 증진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나라 사례를 통해 충분히 확인됐다. 국내 학계에서도 남녀 동시 접종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돼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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