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위·K칩스·AI기본법 '줄폐기'…정쟁에 날린 경제·민생 법안들

'최악 성적표'로 막내린 21대 국회
발의 2.6만건 중 1.6만건 계류
법안처리율 36.6%…역대 최저
野 반대에 재정준칙 뒷전 밀려
구하라법·로톡법 등도 '모르쇠'
22대도 강대강 대치 이어질듯

28일 오후 국회에서 재의결 안건으로 상정된 '해병대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 등을 표결하는 본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최다 발의, 최저 처리율.’


종착역에 다다른 21대 국회가 ‘최악의 성적표’라는 불명예 딱지가 붙은 채 문을 닫게 됐다.


특히 거대 야당의 입법 독주와 집권 여당의 무기력한 대응 속에 주요 민생·경제 법안들이 ‘줄폐기’된 무능 국회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임기 내내 정쟁을 거듭한 거대 양당은 22대 국회 개원 시 이견이 없는 주요 법안들을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폐원 전까지 보여진 극한 대결 양상이 22대 국회로 이어져 개원 시작부터 입법 표류가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날까지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총 2만 5849건 중 계류된 법안은 1만 6392건이다. 법안 처리율(부결·폐기 등 포함)은 36.6%(9457건)에 그쳤다. 역대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하고도 정작 입법에는 ‘나 몰라라’한 탓에 폐기되는 법안 수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대다수가 국민 생활, 경제·산업계와 밀접한 현안 법안들이었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 공간 확충을 위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시설 특별법(고준위 방폐장 특별법)’은 여야가 21대 국회 내 처리하자는 공감대를 이뤘음에도 채상병특검법 거부권 행사로 정국이 급냉각되며 통과가 불발됐다. 고준위 방폐물 처리장 설치가 늦어지면 한빛(2030년)·한울(2031년)·고리(2032년) 원전 등의 가동이 순차적으로 중단돼 ‘전력 대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반도체·2차전지·전기차 등 투자세액공제를 2030년까지 연장하는 이른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도 21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초됐다. 올해 말이 일몰 기한이라 22대 첫 정기국회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설비투자 공제율이 15%에서 8%로 급감해 기업들의 세 부담이 커진다.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에 필요한 정부 전담 조직 신설과 연구개발(R&D) 지원 등을 담은 ‘AI기본법’, 송전선 건설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해양풍력 육성을 위한 ‘해상풍력특별법’ 등 산업계의 숙원들도 빛을 못 보고 일제히 폐기된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GDP) 3% 내로 유지하는 ‘재정준칙 법제화(국가재정법 개정안)’ 역시 ‘1인당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으로 대표되는 확장 재정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가로막혀 일찌감치 뒷전으로 밀려났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민생 법안도 예외 없이 외면 받았다. 가수 구하라 씨의 죽음 이후 양육 의무를 저버린 부모가 상속할 수 없도록 발의된 일명 ‘구하라법(민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20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된 뒤 21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에 도달했으나 결국 통과에 실패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들에 대한 과도한 규제를 완화하는 ‘로톡법(변호사법 개정안)’, 법관 증원을 위한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 개정안’, 부모 육아휴직 확대 등을 담은 ‘모성보호 3법(남녀고용평등법·고용보험법·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에 대해서도 여야가 이견 차를 좁혔으나 22대 국회가 들어서면 원점부터 논의해야 할 상황이다.


이처럼 민생·경제 법안이 줄줄이 자동 폐기되는 가운데 여야가 22대 첫 정기국회에서 견해 차가 적은 법안은 곧바로 처리가 가능하다며 의지를 다지고 있지만 합의점 도출이 쉽지 않은 분위기다. 22대 국회에서도 거대 양당 간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정국 상황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날 부결된 ‘채상병특검법’ 재추진에 더해 ‘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겠다고 벼르고 있어 얼어붙은 정국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21대 국회에서 합의를 이룬 법안이라도 끼워넣기로 ‘정쟁 법안’을 함께 처리하려는 협상 전략을 취하는 경우가 반복된다면 민생 법안이 또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22대 국회에서 여야의 스탠스가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협치는 요원할 것”이라며 “야당은 계속 입법하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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