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전의 중심 전력인 보병의 제식 무기는 소총이다. 원거리에서 적에게 강력한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소총은 역대로 보병 개인 무기 중 가장 압도적인 힘을 자랑한다. 게다가 직사 화기라는 점 때문에 자리만 잘 잡으면 참호와 콘크리트 벽 같은 엄폐물에 몸을 숨기면 사실상 접근전으로 돌격하지 않는 이상 소총으로 타격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소총 기반의 보병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인 수류탄이 등장하게 됐다. 수류탄은 손으로 던지는 근접전투형 소형 폭탄이다. 간단하면서도 비교적 폭발력이 강해 은폐된 인명·무기의 살상 파괴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엄폐를 낀 적의 사격을 멈추고 엄폐물을 무력화하고 전쟁 과정에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농성하는 적을 끌어내기 위해서 수류탄은 필수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보병 부대의 개인 휴대용 무기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수류탄의 원형은 유탄(榴彈)이다. ‘유’ 자는 과일인 석류를 가리키는 단어다. 알알이 박혀 있는 석류알 처럼 터질 때 작은 쇠구슬 같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피해를 주는 폭탄을 의미한다. 폭약을 심어 파편을 흩뿌리면 폭발 범위만큼의 살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즉 초기에 큰 형태의 대포에 실어 날려 보내던 유탄을 더욱 소형화해 직접 불을 붙여 손으로 적진에 던져 넣는 형태로 변화한 것이 수류탄의 기원이다.
다만 손으로 던지는 만큼 투척 거리가 제한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현대전에서 일부는 유탄발사기의 형태로 총열 하부에 장착된 별도의 발사기를 활용해 투사하는 형태가 등장했다. 육군의 경우 분대마다 1명씩 편제된 유탄발사기 사수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 형태가 같은 맥락이다.
물론 유탄발사기 없이 던져서 적에게 일격을 가하는 수류탄은 투척 거리는 짧지만 특유의 범용성으로 여전히 수많은 현대 보병 전투에서 끊임없이 활용되는 무기다.
착실한 엄폐로 다져진 적의 방어선을 흔들어 놓는데 최적의 보조 무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직사화기인 소총이 닿지 않는 영역에 포병 등의 화력지원 없이도 매우 위력적인 발 공격을 넣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 공격 방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발당 가격 또한 저렴한 가성비 덕분에 현대 보병의 필수 공격 무기는 소총과 수류탄 몇 발이 기본적인 작전(공격)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이 같은 까닭이다.
군 관련 과학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최첨단 휴대 무기의 등장으로 그 실전 위력은 미비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보병 장병을 육성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무기다. 예를 들어 신병 교육 시 수류탄 투척 과정에서 신병들이 가장 놀라는 것이 실제 수류탄의 폭음과 반경이라는 점은 이 무기의 위력이 얼마나 평가절하된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런 이유로 현대전 실전에서의 수류탄은 개인 화기류 중에서는 여전히 손꼽히는 살상력을 자랑하는 무기다.
수류탄이 전쟁터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17세기 초반이다. 신형 무기를 적진에 던지며 싸웠던 프랑스 군인, 특히 척탄병은 돌팔매질하듯 손으로 던지는 새로운 폭탄이 마치 석류 같다고 생각해 ‘석류’로 불렸다는 게 통설이다. 실제로 수류탄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손 수(手), 석류 류(榴), 탄알 탄(彈) 자를 쓰는데, ‘손으로 던지는 석류 폭탄’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영어 표기도 마찬가지다. 수류탄은 영어로 그리네이드(grenade)다. 터질 때 탄알 파편이 사방으로 퍼지는 폭탄인 유탄(榴彈)은 모두 그리네이드다. 이는 석류를 뜻하는 포미그래니트(pomegranate)에서 비롯됐다. 라틴어에 뿌리를 둔 옛날 프랑스어에서 나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동서양과 중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류탄을 지칭하는데 ‘석류’라는 과일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석류 폭탄, 즉 수류탄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17세기 초에는 전투가 벌어지면 병사들은 한곳에 집중해 밀집대형으로 싸웠다. 화력도 모을 수 있고 돌격해 오는 적 기병대를 방어하기도 쉽다는 이유에서다. 수류탄은 이 무렵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모여 있는 적군 가운데서 터지면 폭탄 속 탄알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한번에 다수의 적을 살상할 수 있어 당시에는 수류탄이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됐다.
프랑스 육군은 척탄병 중대를 루이 14세 때인 1667년 최초로 조직됐다. 뒤이어 1678년 영국에서도 척탄병 부대를 창설했다. 척탄병(擲彈兵)은 수류탄을 전문적으로 투척하는 병사로, 프랑스에서는 보통 일개 연대를 8개의 중대로 편성하고 그중 한 개 중대가 척탄병 중대였다. 폭탄을 멀리 투척할 수 있는 어깨 힘이 좋고 체격이 큰 건장한 병사로 구성했다. 일종의 돌격대다.
수류탄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K400 계열 수류탄은 담뱃갑만한 소형 경량의 수류탄으로 던지기 편하며 미세한 파편의 효과가 뛰어난게 장점이다. 우리 군의 대표적 수류탄이다. 미군의 M67 수류탄과 유사해 보이지만 살상력은 더욱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한화에서 제작해 일선 부대에 보급됐다. K413 세열수류탄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K413 수류탄은 무게 240g, 폭발시간 4~5초, 살상범위 10~15m에 이른다. 1발당 파편은 1000여 개다. 완성수류탄의 구조는 크게 뇌관을 작동시키는 신관결합체와 탄체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관결합체는 뇌관, 공이, 지연제결합체, 안전손잡이(안전핀·안전클립 포함) 등으로 구성됐다.
작동원리는 안전클립과 안전핀을 제거하면 공이가 뇌관을 타격하고, 상단의 지연제가 점화된다. 지연제는 4~5초 동안 타고 들어가는 과정을 거쳐 기폭약을 점화시키고, 탄체에 충전된 고폭화약이 폭발해 최종 성능인 수류탄 파편이 비산하게 된다.
고음과 섬광으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수류탄도 있다. K409 섬광수류탄이 해당된다. 테러리스트를 진압하기 위해 고안돼 주로 인질 구출 같은 특수한 상황에 이용된다. 또 K410 연막수류탄은 수류탄형 연막탄으로 소형 경량 모델이다. 염수(鹽水)에 대한 저항성을 갖고 있어 주로 해상·해안에서 사용되는 무기다. K-M14 소이수류탄의 경우는 2200도의 고열로 장비·자재들을 파괴한다. 0.5인치 두께의 금속판을 녹일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K-MK1B 조명수류탄은 야간작전시 조명을 위해 사용하는 수류탄형의 조명탄이다. 탄체가 백색으로 돼 있어 쉽게 구분된다. 이외에 훈련·연막 사용 등 용도에 따라 K400 훈련용 수류탄·K-M18 연막수류탄 등도 있다.
미군은 M67로 불리는 세열수류탄을 사용한다. M67은 살상반경 15m로 안전핀을 뽑고 안전 손잡이를 놓게 되면 4~5초후에 폭발한다. 단단한 물체에 부딪히면 바로 폭발하는 M68수류탄도 있다. 러시아군의 대표적인 수류탄은 RGD-5 공격용 수류탄이다. 무게가 310g밖에 되지 않는다.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RGO-78 수류탄은 공격용보다 무거운 480g이다. 살상반경만 20m에 달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적국 요인을 암살하는 작전은 대부분 실패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요인 암살 작전은 ‘프라하의 도살자’로 악명이 높았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1942)를 제거힌 작전이다. 나치 독일 초대 친위대 본부장과 비밀경찰(게슈타포) 국장을 맡았던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반제 회의를 주도한 인물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후계자로 평가받았던 나치의 거물이다.
하이드리히가 체코 총독으로 있는 동안 체코의 무기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 덕분에 그는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나치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과 친위대장 힘러로부터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을 지시받은 그는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최해 유대인들을 유럽 각지의 수용소에 보내 학살하는 정책도 총괄했다.
이 같은 악명 때문에 영국 정보부는 망명정부의 체코 군인들을 훈련시키면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앤트로포이드 작전’을 추진했다. 1942년 5월 27일 하이드리히는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를 타고 출근했다.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인 자동차를 향해 암살 요원들은 사격했지만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다급하게 재장전을 시도하다가 문제가 생기면서 요원들을 도주했고, 독일군 운전병이 권총을 쏘면서 추격했다.
하이드리히는 당시 자동차에서 내려 서 있는 상태였다. 그때 또 다른 암살 요원이 던진 수류탄이 자동차 아래서 폭발했다. 폭발한 자동차의 파편에 맞은 하이드리히는 병원으로 이송됐다. 베를린에서 급파된 외과의들이 하이드리히를 적극 치료했지만 결국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직전 하이드리히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 최종해결책’이 담긴 서류였다. 하이드리히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격노했다. 곧 프라하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독일군의 잔혹한 보복이 이어졌다. 프라하에서만 15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조자로 몰려 사살됐다. 3000명이 넘는 유대인이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하이드리히가 살았더라면, 그의 끝까지 손에서 넣지 않는 작전계획에 따라 12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제거하는 계획이 실행됐을 것이다. 영국 정보부와 체코 군인들은 그를 암살한 덕분에 전대미문의 학살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프라하의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 대성당에는 지금도 그들의 저항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