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이 결국 무산되면서 22대 국회가 숙제를 이어받았다. 연금개혁의 시급성과 국회 정치일정을 고려하면 여야가 22대 국회 개원 초부터 연금개혁을 제1순위 과제로 두고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균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29일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하루라도 빨리, 적극적으로 연금개혁 논의를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21대 국회에서 결론은 내지 못했지만 보험료 인상에 합의하는 등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며 “이 자체가 역사적인 성과”라고 말했다. 연금개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으니 지난 국회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연금개혁의 속도를 높여달라는 주문이다. 김 교수는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김 교수가 속도전을 강조한 것은 연금개혁 논의가 지체될 경우 자칫 22대 국회에서도 연금개혁 결론을 내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때문이다. 2026년과 2027년에는 각각 지방선거와 대선이 있어 정치권이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과제를 다루기 어렵다. 따라서 전반기 국회에서 마무리지어야 하지만 여야는 당장 원구성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연금개혁을 논의할 기구를 꾸리는 것부터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이 모수개혁과 구조개혁 논의를 병행하자고 주장해 논의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재정안정성에 초점을 맞춰 모수개혁을 단행하고 보장성을 높일 수 있는 구조개혁을 하는 ‘투트랙’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연금 개혁은 시간이 돈”이라며 하루빨리 연금 개혁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당부했다. 국민의힘이 구조 개혁과 모수 개혁 논의를 병행하자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 모수 개혁과 구조 개혁을 두 단계로 나눠 진행하거나 구조 개혁의 내용과 범위를 구체적으로 확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정 안정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소득대체율 인상이 오히려 고소득 수급자들에게 유리하다는 점에 주목하며 보장성 강화는 저소득층을 타깃으로 한 가입 기간 확대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강구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개혁이 늦어질수록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커진다”며 22대 국회가 연금 개혁 논의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연구위원은 “구조 개혁까지 함께 논의하려면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수 있다”며 “정부도 국회 논의에 맞춰 보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KDI는 올해 국민연금을 신구 계정으로 이원화하는 개혁을 할 경우 구연금에 지원해야 하는 재정 부족분이 609조 원이라고 추계하면서 개혁 시점이 5년 연장될 경우 부족분은 869조 원으로 증가한다고 밝혔다. 연금 개혁이 지체되면 연평균 52조 원, 하루 기준 약 1425억 원의 재정 부족분이 누적되는 셈이다.
여야도 이와 같이 연금 개혁이 시급하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만 국민의힘이 ‘구조 개혁, 모수 개혁 논의 병행’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원활한 논의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만 조정하는 모수 개혁과 달리 구조 개혁은 종류만 십수 가지에 달하고 방식에 따라 고려할 변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이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구조 개혁과 모수 개혁을 동시에 하면 4년 내내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며 “이해관계가 있는 단체들이 반대하기 시작하면 기존의 합의도 깨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 역시 “구조 개혁도 좋지만 우선 수급 구조의 균형부터 맞춰야 한다”며 “우선 보험료를 올려 재정 구조가 안정화되고 나서야 구조 개선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정 안정에 초점을 맞춰 모수 개혁을 단행한 뒤 구조 개혁을 하는 것이 맞는 순서라는 취지다.
소득대체율 인상이 수급자 사이의 소득 격차를 키울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소득대체율을 인상할 경우 고소득 수급자의 연금 인상 폭이 저소득 수급자보다 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계층에 연금 재정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득대체율이 40%에서 44%로 인상되는 경우 생애 평균 월소득이 500만 원이었던 수급자의 급여 인상 폭은 16만 원이지만 생애 평균 월소득이 150만 원인 수급자의 인상 폭은 9만 원에 그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소득대체율 인상으로 발생한) 적자를 메우는 데 재정을 투입했을 때 재분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차라리 ‘크레디트 제도’나 기초 연금에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크레디트 제도는 출산·군복무·실업 등의 사유로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못한 경우 그 기간만큼 가입 기간을 국고로 보조해 실질소득 대체율을 높여주는 정책이다. 국민연금은 가입 기간에 비례해 수급액이 늘어난다. 가입 기간 20년부터 매년 소득대체율이 1%포인트씩 늘어 40년을 채울 경우 생애 월평균 소득의 40%를 보장 받는다. 하지만 연금제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탓에 수급자들의 평균 가입 기간은 20년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실업이나 출산 탓에 경력이 단절된 근로자나 영세 자영업자의 가입 기간이 짧은 것이 문제다. 취약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가입 기간을 늘리는 게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 역시 이 같은 이유로 21대 국회 연금 개혁 논의 과정에서 출산·실업·군복무 크레디트 제도 확대를 검토한 바 있다.
다만 이 같은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보험료 인상 중심의 재정 안정화 모수 개혁이 전제돼야 한다. 수지 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보험료율(19.8%)의 절반도 안 되는 현행 보험료율(9%) 구조 속에서는 취약 계층의 가입 기간을 늘리는 개혁이 되레 연금 재정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윤 명예 연구위원은 “보건복지부가 1안(보험료율13%-소득대체율50%)을 가정하고 의무 가입 연령을 높였을 때 재정 전망을 계산했더니 누적 적자가 오히려 늘었다”며 “보험료율을 정상화하는 개혁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