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지배자 '건반 악기'[서우석의 문화 프리즘]







지금 건반 악기는 모든 음악에서 사용되고 있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나아가 디지털 음향에 이르기까지 건반이 사용된다. 건반 악기의 발생과 발전을 살펴보자.


가장 오래 된 건반 악기의 유물은 토기(terracotta)였다. 위 첫째 사진은 수압-오르간과 “salpinx”(트럼펫) 연주자의 모습이다.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든 것이다. 다음 사진은 튜니시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역시 수압-오르간의 모습이다. 둘 다 기름을 사용하는 램프의 장식품이다.


건반의 발전 과정을 다음 순서로 살펴보기로 한다. 1.입 안의 공기 압력, phorbeia, 2.공기 주머니, 3.백파이프, 4.공기상자와 슬라이드 장착, 5.풀무 오르간, 6.수압 오르간, 7.교회 오르간, 8.하프시코드, 9. 피아노의 순서다.


1. 공기주머니의 근원은 그리스 시대의 “phorbeia”에 이른다. 올림픽 등의 운동경기장에서 노예들은 아울로스라는 피리를 연주했다. 온종일 피리를 불어야 하는 힘든 작업을 위해 가죽 띠에 구멍을 뚫어 아울로스를 물고 띠를 목 뒤로 묶었다. 볼의 아픔을 덜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띠가 “phorbeia”다.





2. 이 구강의 공기 주머니, 볼을 보호하기 위한 가죽띠가 확대되어, 가죽 주머니로 모습을 바꾼다. 아래 사진은 양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백파이프로 2017년 불가리아의 백파이프 경연 대회에서 보인 모습이라고 한다.




3. 백파이프(bagpipe)가 완성된다. 백파이프는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곳에서 민속악기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은 그림은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백파이프를 소년이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과 스코틀랜드 백파이프의 모습이다.








다음 사진은 13세기의 프랑스 성당 외부의 조각상이다. 여기서도 공기주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가죽 주머니는 나무로 만든 공기상자(air chamber)로 발전하고, 슬라이드가 공기압의 개패를 결정한다.




5. 다음은 풀무 오르간의 모습이다. 소형과 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그리스 사람들은 수압을 이용해 공기 압력을 만들고 이를 이용해 광장에서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 거대한 hydrorgan(수압오르간)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유물은 전해오지 않는다. 아래 그림은 수압오르간의 개념도와 20세기에 헝가리에서 복원한 수압오르간 모습이다.







7. 아래 그림은 교회 오르간의 건반의 모습이다. 위 건반은 손 건반이고 아래 건반은 발로 연주하는 저음 건반이다. 독일 Halberstadt 시의 파베르(Nicholas Faber)가 1361년에 만든 건반으로서, 1619년 출판된 “Syntagma Musicum”에 그림으로 전해오는 모습이다.




8. 오르간에 이어 하프시코드에 건반이 적용된다. 하프시코드는 “zither”에 건반을 더한 모습이다. 하프시코드의 최초의 모습은 독일의 하노버 근처 민덴(Minden) 시의 대성당 제대 뒤에서 그 모습이 발견되었다. 제대 뒤의 부조와 그 일부의 확대 사진이다.





위 사진의 둥근 그림 테두리를 확대한 사진에서 하프시코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1425년에 건물이 건조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악기 모습으로 추정된다. 다음 사진은 1646년에 프랑스의 안트워프에서 제작된 후, 1780년 손상된 부분을 수리한 하프시코드의 모습이다.




1600년 이후 1750년까지 바로크 음악 시대의 악기 왕좌는 성당과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이었으며, 오르간 연주자가 가장 존경 받는 음악가였다. 파이프 오르간의 건조는 때에 따라 수십년이 걸렸다. 그 건조 기술은 당시의 첨단의 테크놀로지였다. 그 완벽한 완성을 위해 바흐(J. S. Bach)를 비롯해 많은 연주자들의 감수가 필수적이었다. 오르간이 교회 음악을 주도한 반면, 당시 발전을 시작하는 세속 음악은 하프시코드가 주도한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로 이어진다.


9.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인 클래식 시대에 이르면 피아노 음악이 꽃을 피운다. 19세기에 들어서면 그랜드 피아노가 악기의 왕좌를 이어받는다.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등이 그 대표적인 작곡가 겸 연주자였다. 19세기에 이르러 교향곡이 부상하고 지휘자가 왕좌를 접수한다. 작곡가를 겸한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keyboard”라고도 불리는 건반악기의 발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세계에는 여러 문화권이 있었지만 이처럼 한 악기가 그와 같은 꾸준한 변형과 발전을 거친 경우를 찾아 보기가 어렵다. 이러한 변형과 발전은 서양음악 자체에도 적용된다. 20세기 최고의 음악 역사가인 아브라함(Gerald Abraham, 1904–1988)은 그 발전 과정을 “evolution”(진화)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교개혁, 30년 전쟁, 과학 혁명, 오페라의 범람, 프랑스 혁명, 산업 혁명 등을 거치면서 유럽음악은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해 그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변화 중 오페라의 범람은 음악 내적인 진화였다.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시작해 각국으로 퍼지면서 여러나라의 언어와 풍습을 담은 무대 예술로 전개된다. 오페라의 이 다국적화는 이탈리아 중심 음악에 대한 정체성 도전이었다.


1900년 이전까지 유럽의 음악이 꾸준한 진화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왕조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종교가 문화적 이념을 받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사의 경우 1600년 이전은 가톨릭이 바탕이었고, 그 이후에는 남부의 가톨릭과 북부의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발전한다. 잔잔한 충돌은 더러 있었지만, 전체를 흔드는 갈등은 없었다. 동로마 제국의 패망 후, 비잔틴 교회의 음악은 러시아로 옮겨간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romanization) 이후 세 명의 여왕들은 가톨릭 음악과 프로테스탄트 음악을 고루 흡수한다. 그 여왕들이 좋아한 발레와 오페라는 20세기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 후 클래식 음악은 해체주의 사상과 더불어 몰락한다. 쇤베르크의 무조성 음악은 해체주의 철학의 선조였다. 20세기 후반의 현대음악은 첨단 사상 추구의 철학이 된다. 그러나 실은 철학자들도 듣지 않는 음악이다. 하지만, 건반악기는 건재한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왕조가 끝나면, 음악이 사라지면서, 악기도 따라 없어지거나 그 품격을 잃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건반은 살아남아 지금도 세계의 음악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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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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