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1조 3800억원을 지급하라고 법원이 판단하면서 양측 희비가 엇갈렸다. 항소심 재판부가 노 관장에 대한 SK㈜ 기업가치 증가와 경영 활동 기여도를 인정하면서 승패가 결정됐다. 재판부가 선경건설(SK에코플랜트 전신) 명의 약속어음과 메모 등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 온 증거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흘러갔다고 인정하면서 1심 결과가 180도 뒤집힌 셈이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가사2부(김시철 부장판사)는 지난달 30일 최 회장·노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혼인 기간, 생성 시점, 형성 과정 등에 비춰 SK 주식 등에 노 관장 측 기여가 인정된다”며 “최 회장은 노 관장에게 위자료 20억원 및 지연손해금과 재산 분할로 1조3808억1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2022년 12월 6일 1심의 판단이 나온 지 1년 6개월 만이다. 항소심 판결로 위자료·재산 분할 금액은 각각1억원, 655억원에서 20억원, 1조3808억1700만원으로 20배 넘게 늘었다. 재판부는 최 회장의 재산 총액을 4조115억원가량으로 보고, 최 회장 65%, 노 관장 35% 비율로 분할하라고 지시했다. 분할 방법은 현금 분할로 한다. 향후 재판에서 판결이 활정되면 재산 분할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할 전망이다.
◇‘선경 300’ 메모 등 인정…법원 “일부일처제 존중 태도 아냐” 질타
양측 희비가 엇갈린 판결의 배경에는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선경건설 명의 약속어음과 메모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최 전 회장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인정한 점이 자리하고 있다. 해당 메모는 김 여사가 1998년 4월과 1999년 2월에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을 기재한 것이다. 여기에 ‘선경 300억원’이 쓰여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관장 측은 항소심에서 메모·어음을 증거로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300억원을 건네는 대신 최 전 회장은 담보로 선경건설 명의로 이 어음을 전달했고, 이 돈이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나 선경(SK) 그룹의 경영 활동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해당 자금이 SK그룹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고 판단, 재산 분할 액수를 1심의 20배 수준으로 높였다. 이들 증거가 노 관장이 SK 기업가치 증가와 경영 활동에 기여했다는 판단을 이끌어 낸 셈이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요구하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 형사 사건에서 나온 최 전 회장의 진술을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최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해임 1988년 30억원을 준비해 갔는데, 노 전 대통령은 “사돈끼리 돈을 주고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물리쳤다고 진술했다. 최 회장 측은 또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결과 등을 근거로 SK그룹에 비자금 유입이 없었고, 대통령 사돈 기업이라 오히려 불이익을 받았다고 반박했지만 결론은 뒤집지는 못했다.
법원은 위자료에 대해서도 ‘혼인 파탄의 정신적 고통을 산정한 1심 위자료 액수가 너무 적다’며 판단을 달리했다. 재판부는 “혼인 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2019년 2월부터는 신용카드를 정지시키고 1심 판결 이후에는 현금 생활비 지원도 중단했다”며 “소송 과정에서 부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盧 비자금 시인에도…소멸 시효 등에 환수 사실상 불가능
의혹 제기 32년 만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법정에서 거론되며 최 회장·노 관장 사이 이혼 소송의 핵심 쟁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해당 자금이 노 전 대통령의 다른 비자금처럼 형사·사법절차에 따라 불법 자금으로 인정돼 국고로 환수되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노 전 대통령과 최 전 회장이 모두 사망한 데다, 소멸 시효 문제도 있어 수사 기관이 비자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사에 착수하기 어려운 탓이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증거 확보도 쉽지 않아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 수사도 불가능하다. 해당 죄에 따른 공소시효(5년)도 한참 지난 상황이다.
최 전 회장의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된 건 지난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원길 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최 전 회장의 연 세후소득이 10억원에 미치지 못하는 데도 매입 대금 약 600억원을 지급한 점이 의문이라며 자금 출처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비자금 의혹이 본격 제기된 1995년에도 “자금조성내역은 현금 68억원, 채권매각 317억원, 주식매각 16억원, 양도성예금증서(CD) 매각 236억원 등 모두 637억원이었다”며 “이 중 채권과 주식의 실소유자가 전직 대통령(노 전 대통령)과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95년 최 전 회장을 조사하는 등 비자금 의혹을 수사했다. 하지만 자금 출처를 노 전 대통령 비자금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해당 자금은 추징금 2628억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