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미국 LA에서 열린 ‘밀컨콘퍼런스 2024’ 현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자회사 알랏의 기업개발 부문 헤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전기가 많이 필요한 시대가 되면서 변압기는 지금 주문해도 받는 데 6년 걸릴 정도로 공급 부족”이라며 “전기 유틸리티 공급 시설에 투자해 이 산업이 수요에 맞춰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미션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즈음 알랏은 전력 분야 투자를 담당하는 사업 부문을 신설했다.
사우디 국부펀드가 전기 부문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는 배경에는 급속한 인공지능(AI) 발전이 자리하고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들은 경쟁적으로 데이터센터를 짓고 나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지아주 르포 기사를 통해 데이터센터 급증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전기 부족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고 타전했다. 백악관은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지원하는 실무 그룹을 지난주 신설했다. 석탄 등 화석에너지와 태양광 등 청정에너지 투자도 병행한다.
이 모든 흐름은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2022년 이후 기준금리를 올린 이유는 경제 수요를 눌러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것인데 AI발 기업투자가 이어지니 경제 성장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1분기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3%로 낮아졌지만 애틀랜타연방준비은행은 2분기에 다시 2.7%로 높아진다고 전망했다.
AI 기대감에 주가가 오르는 점도 연준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이다. 엔비디아 등 빅테크의 AI 관련 사업이 성장하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과 나스닥종합지수는 최근 1년간 각각 25%, 28% 상승했다. 주가 상승은 자산 효과를 일으켜 미국 소비 호조의 밑바탕이 됐다. AI로 인한 투자와 소비 확대는 연준이 맞닥뜨린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더욱 힘겹게 만든다.
이제 연준은 진지하게 경제 체력이 달라진 게 아닌지 살펴보고 있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최근 “모든 연준 위원들이 중립금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경제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고 예고했다. 경제를 누르지도, 띄우지도 않는 금리의 균형점이 올라갔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기준금리가 기대만큼 경제를 강하게 누르지 못한다는 의미다. 2009~2018년 뉴욕연은 총재를 지낸 빌 더들리는 심지어 현재 미국의 중립금리가 5%라고 추산했다. 지금의 기준금리(5.25~5.5%)는 사실상 중립금리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얘기다.
만약 연준이 중립금리가 높아졌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한동안 팬데믹 전보다 높은 금리의 시대에 살게 된다. 추가 금리 인상도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중립금리 상승 원인이 오로지 AI에 따른 투자 증가와 주가 상승 때문만은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넉넉한 은퇴자금,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제조업 활성화 정책 등 다른 요인들도 상존한다. 그럼에도 현시점 AI의 성장이 경제 체력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연준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우리나라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고금리가 길어지면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한국의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낮지만 이 구조가 지속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기술혁신이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AI가 처음은 아니다.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유통 구조의 등장은 2010년대 전 세계적으로 물가를 낮춰 각국 통화정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이번 AI의 영향은 보다 복합적이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물가에 부담을 주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여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지금 우리는 AI라는 새로운 흐름에 뒤따라갈지, 정책적으로 선도적인 위치에 설지 갈림길에 있다. AI가 산업구조와 고용, 소비자물가, 통화정책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선제적인 대응에 나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