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스(residence)는 집이나 아파트처럼 사람이 살 수 있는 주거를 뜻하고 레지던시(residency)는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거주 또는 전속 기간을 의미한다. 예술 용어로서 ‘레지던시’ 혹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미술관·재단·갤러리와 더불어 미술계를 이루는 주요 기관이자 제도를 가리킨다. 예술가에게 일정 기간 작업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 역할을 한다. 정식 표현은 ‘아트 인 레지던스(Art-in-Residence)’지만 창작 공간, 창작 스튜디오, 예술마을, 창작 레지던스 등이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레지던시인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20년 가까운 역사를 마무리하고 내년 이후 서울 시내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마포구 상암동 난지한강공원 내 옛 침출수 처리장 관리동을 미술 작가 작업실 겸 전시장으로 개조해 2006년 개관한 이곳은 유휴 시설의 재활용과 지역 재생의 모범 사례로 꼽혔고 지금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하지만 최근 서울시가 해당 부지의 용도 변경을 결정하면서 내년 1월 말 이후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됐다.
예술 전문 국립대학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미술원 부설 기관인 ‘창작스튜디오’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외국 예술가를 입주 작가로 선발하기 시작했다. 2016년 개소한 이 레지던시는 입주 작가 공모에서 출신 학교나 국적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해외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뽑는 것은 올해가 사실상 처음이다. 입주 작가는 1년간 학교 내 창작 공간을 이용하면서 재학생 연계 활동, 비평가 매칭 등의 프로그램을 경험하며 ‘국제 교류’를 하게 된다.
원래 레지던시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이 펼친 지원 사업에서 시작됐다. 1663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젊고 유망한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을 직접 경험하라며 이탈리아에 일정한 거주지를 제공한 것이 최초의 해외 레지던시로 꼽힌다.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레지던시인 ‘라익스 아카데미(네덜란드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 네덜란드 정부는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암스테르담 시내 빈 건물을 활용해 전 세계 작가들을 모으고자 했고 이것이 ‘라익스 왕립학교’ 설립으로 이어져 레지던시를 탄생시켰다. ‘베타니엔 스튜디오’로 불리는 독일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은 19세기 중반 국왕의 지시로 지어진 병원 건물이 1974년 철거 위기에 처하자 이를 재활용하자는 여론이 모여 현대미술 전시 공간으로 부활했다.
국내 최초의 공립 레지던시는 1995년 광주시가 광주비엔날레 개최에 맞춰 조성한 ‘팔각정창작스튜디오’인데, 시민 휴식 공간 확보를 이유로 2011년 문을 닫았다. 외환위기 등으로 기초 예술 분야의 창작 환경이 열악해지자 199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역 폐교를 활용해 작업실을 제공하면서 공립 레지던시가 늘어났다. 폐교를 활용한 레지던시는 ‘지역 재개발 사업’으로 확장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창동과 고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등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의 힘으로 쇠락한 지역을 되살려 도시 브랜드를 개발하는 ‘컬처노믹스’가 확산하던 2008년 서울문화재단이 앞장서 도심 유휴 공간을 활용한 생활 밀착형 레지던시를 대거 조성하기 시작했다.
한국 레지던시의 30년 역사에서 2010년대가 확산 전성기였다면 지금은 지속성 검토를 수반한 재도약의 시기로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고 지자체장 선거의 ‘정치 바람’을 거치면서 인천시 ‘인천아트플랫폼’이나 대전시 ‘테미예술창작센터’ 등이 존폐 위기에 놓였다가 기사회생했다. 반면 경기도가 국제 레지던시로 조성한 안산의 경기창작센터는 2021년 운영을 중단했고 대구시는 달성군 가창창작스튜디오의 문을 닫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역 재생의 역할을 맡았던 레지던시가 문화 거점과 도시 브랜드로 도약할 때다. 나아가 한예종의 사례처럼 레지던시를 국제 교류 및 문화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기를 제안한다. 2000년대 이후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국가 간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여겨졌고 각국 정부 및 공공기관이 정책적으로 자국 예술가의 국제 레지던시 참가를 지원하고 있다. 레지던시는 단순한 창작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