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나비센터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결과를 보고 두 번 놀랐다.
우선 1심 결과가 완전히 뒤집어진 점이다. 노 관장은 1조 4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재산 분할 판결을 얻어냈다. 노 관장이 어머니(김옥숙)가 써 놓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메모쪽지 2장을 공개하면서 재산 분할 규모가 1심 때보다 20배나 많아졌다. 만일 대법원에서 이 같은 판결이 확정되면 국내 재계 서열 2위 그룹의 경영권마저 흔들릴 수 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항소심 판결 결과가 나온 뒤 노 관장 측 변호인이 밝힌 소감이다. 변호인 측은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주의에 대한 ‘헌법적 가치’를 깊게 고민한 아주 훌륭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헌법적 가치. 이 단어를 접한 순간 지난해 개봉해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서울의 봄’이 머리를 스쳐갔다. 이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당시 육군 소장이던 전두환이 육사 동기 노태우 등과 손잡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현대사의 비극을 다뤘다.
헌법을 무참히 짓밟은 군부 세력의 가족이 45년 세월이 흐르자 당당히 헌법적 가치를 운운하는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이혼소송 항소심 결과가 영화가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릴 때 나왔다면 어떤 사회적 현상이 벌어졌을까 하는 허튼 상상도 잠깐 해봤다.
이번 판결을 다룬 기사들에는 엄청난 클릭과 함께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사실 대부분이 바람을 피운 나쁜 남편, 최 회장을 지탄하는 내용이다. 우월적 남성과 핍박받는 여성이라는 일종의 ‘젠더 이슈’로 치부된 모양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평범한 부부의 이혼소송이 아니다. 선대 회장으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승계된 재벌’이라는 한 축과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남긴 불법 비자금으로 재산을 증식한 딸의 권리 주장이 근본적인 핵심이다.
결국 항소심 법원은 노 전 대통령이 건네준 비자금과 함께 유무형의 지원사격이 SK그룹의 인수합병과 통신사업 진출에 상당한 역할을 했고 이는 곧 노 관장이 재산 분할을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판시했다. 판결문만 놓고 보면 매출 규모가 200조 원에 달하는 SK그룹은 사실상 노 전 대통령이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권리는 그의 딸인 노 관장이 마땅히 ‘기여’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상속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것이 항소심 법원이 A4 용지 200쪽에 걸쳐 빼곡히 쓴 판결의 요지다.
설령 1991년 당시 3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불법적인 자금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 사실상 법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법원발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항소심 법원이 ‘가정의 정의’에만 매몰돼 ‘사회적 정의’에는 눈을 감은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노 관장의 네 살 터울 남동생인 재헌 씨는 그동안 몇 번씩이나 5·18 민주묘역을 찾아 광주의 영령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 진실성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쿠데타와 학살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역사적 과오를 아들이 책임지려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노 관장이 재헌 씨처럼 역사적 사죄의 발걸음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물론 “언제적 연좌제냐”라고 항변한다고 해도 그만이다.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자식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혼소송에서 이제껏 꽁꽁 숨겨왔던 노란색 포스트잇 형태의 ‘비자금 메모지’를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하면서까지 재산 분할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외도로 아이까지 낳은 남편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혼소송에서 유책의 당사자가 최 회장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이에 대한 비난은 결국 그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하지만 ‘나쁜 남편’ 문제와는 별개로 부정부패와 기업들의 목을 비틀어 쌓은 막대한 불법자금이라는 것을 법원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이를 ‘안정적 상속’ 구도로 완성시켜준 것 역시 ‘모순’이다. 일반인들이 법원 결정을 놓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묘수가 필요하다.
이제 공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가정의 정의와 사회의 정의 사이에 어떤 솔로몬의 판결이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