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휴대전화나 이메일 등으로 편하게 소식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전근대시기 국가 기관에서 운영하던 공적인 통신망을 제외하면 국민 대다수가 불소통 시대에 살았다. 이런 시기에 우편통신망은 혁명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혁신에 인천이 중심에 있다.
인천에서 우편제도의 시행은 1884년 11월 우정총국(郵政總局) 인천분국이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같은 해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지되자 업무를 중단하게 됐다.
근대우편은 우표를 이용 기본 수단으로 삼고 출발했다. 당시 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다섯 종류로 나눠 운영됐다. 우표의 액면 금액이 당시에 통용된 화폐 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돼, 훗날 우표수집가들은 이 우표를 ‘문위우표’라고 불렀다.
이후 1895년 7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새로운 우편사업이 재개되면서 서울 한성과 인천에 우체사를 설치해 우편업무를 동시에 시작했다.
당시 집배원은 ‘우전인(郵傳人)’ 혹은 ‘체전부’라고 불렸다. 이들은 한글과 한문을 읽을 수 있으면서 체력까지 뛰어난 인재였다. 당시에만 해도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을 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인철도가 부설되기까지는 걸어 다니면서 우편물을 교환했는데, 인천과 한성의 체전부가 하루 8시간 80리(약 30㎞)의 길을 걸어 중간지역인 서울 오류동에서 만나 우편물을 교환했다.
인천 개항과 함께 일본은 영사관 내에 간이우체국을 설치해 우편 업무를 취급했다. 조선정부는 1895년 우체사를 설립해 우편업무를 재개하면서 일본우편국 철폐를 요구했다. 하지만 1905년 4월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우리나라 통신권을 강탈했다. ‘우체사’도 일본식인 ‘우편국’으로 바꾸고 금융업무까지 취급했다. 일본의 인천우편국은 1923년 12월 중구 항동에 새 청사를 지어 이전했다.
광복 후 1949년 8월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인천우편국’은 처음 사용한 명칭인 ‘인천우체국’으로 돌아왔다. 현재 ‘인천중동우체국’이라고 불리고 있는 인천우체국은 현존하는 우체국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