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이) ‘쟤네 외계에서 왔다고? 얼마나 특별한지, 특이한지 보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매 콘서트마다 저희가 초능력을 녹여내서, 제가 노래하다가, 하늘에서 비가 내려와, 그러면 비가 오고” (무대 중앙의 장치가 가수의 손짓에 맞춰 물을 뿌린다)
K팝의 제작 시스템과 글로벌 팬덤(fandom)을 분석한 다큐 ‘케이팝 제너레이션’(티빙, 2023)에 출연한 그룹 엑소의 멤버 수호는 그들의 세계관을 말하며 본인도 쑥스러운지 웃어보였다. 데뷔 12년 차인 엑소의 세계관은 멤버들이 ‘엑소 플래닛이라는 가상의 행성에서 기억을 잃고 지구에 불시착한 초능력자들’이라는 설정이다. 카이는 순간이동을 하고, 세훈은 바람을 일으키며, 수호는 물을 다스린다.
듣는 이들의 손발을 오글거리게 하는 이런 이야기에 진지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팬덤이다.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그런 황당한 설정을 ‘믿기로 한’ 사람들이 팬덤”이라고 설명한다.
팬덤은 현실의 아티스트가 가상세계 ‘광야’로 떠난 아바타와 교감하면서 성장한다는 걸그룹 에스파의 스토리텔링에 공감한다. 또 세상의 멸망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 ‘별을 쫓는 소년들’이 바로 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기필코’ 믿어준다.
fanatic(열광자, 광신자)에 -dom(영토, 집단)을 합성해 만들어진 팬덤이라는 단어 자체에 그들의 행동 방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우직한 충성스러움, 때로는 맹목적인 헌신은 무리를 지어야 가능한데,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하는 저널리스트 마이클 본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하면 다른 집단과 구별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집단의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해 독특한 색상의 유니폼을 입거나 신비로운 의식을 행하거나 특정 세계관을 옹호하는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팬덤의 시대, 2023)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투어 콘서트 ‘디 에라스’ 8월 런던 공연을 앞두고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하시기를 늦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쯤 되면 2주전 스코틀랜드 공연 당시 팬덤의 떼춤이 일으킨 지진은 재밌는 해프닝 수준이다.
그런 팬덤에 다른 얼굴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병적인 팬심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상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과도한 집착이다. 필자는 아직도 지난 봄 열애설이 돌았던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가 왜 장문의 사과문을 써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팬덤으로부터 추앙받는 인물들이 그로 인해 심각한 오판을 한다는 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거짓말로 결국 기소된 가수 김호중, 수호와 함께 초능력을 뽐냈지만 이제는 SM과 법정 공방을 시작하는 엑소의 첸백시(첸, 백현, 시우민). 그들 모두 ‘팬덤을 등에 업으면 어떤 일도 벌일 수 있다’는 착각 탓에 일을 키웠다는 게 엔터업계의 견해다.
비현실적 세계관을 믿는 팬덤의 비이성적 충성심, 이를 과신하는 리더들의 이기심이 결합돼 정치판은 오염되고 정치인은 타락의 길을 걷는다. 총선 후에도 한국의 팬덤 정치는 이상 기후로 비롯된 날씨 만큼이나 뜨겁다. 총선 대승에 취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사법 리스크가 점점 커지자 검찰과 사법부, 언론을 싸잡아 비난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이에 국민의 힘 김재섭 의원은 지난 17일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검찰은 왜곡 수사를 하고, 판사들은 편향적 판결을 하고, 언론은 조작해서 이재명 대표에게 불리하게 보도하고 있다는 게 이 대표와 민주당의 세계관"이라며 "그 세계관 밖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 역시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야당 대표의 폭주를 구경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자신과 강성지지층이 구축한 세계관에 둘러쌓여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그들의 잘못된 판단이 몰고 오는 국가의 불안이 국민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정치 지도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팬덤과 거리를 두고 가상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바람일까. 지난해 봄 블랙맘바와의 사투를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며 ‘광야’라는 세계관에서 벗어난 에스파의 인기는 여전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