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소수 빅테크들의 ‘합종연횡’을 통한 독점 시도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정보기술(IT) 업계를 장악한 빅테크 기업들이 새롭게 떠오르는 오픈AI나 앤스로픽 등 AI 대표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힘을 합치면서 시장 장악력을 강하게 키우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AI 산업에서 변방에 놓인 국내 AI 기업들은 여전히 ‘스몰테크’에 머물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몰테크 수준에 머물러서는 글로벌 주류를 따라잡기 어렵다면서 적극적인 빅테크와의 공조 및 합병 등을 추진해 ‘몸집 키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투자 줄고 소수 기업에만 집중…합종연횡 가속화=20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AI 정책관측소에 따르면 코로나 시기 정점을 찍었던 전 세계 AI 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VC) 투자는 최근 2년 새 대폭 감소했다. 2021년 2126억 2100만 달러(약 294조 원)였던 AI 투자액은 2년 연속 내리막을 걸으면서 지난해에는 984억 4400만 달러(약 136조 원)로 반 토막이 났다. 코로나 이후 경기 침체와 함께 투자자들이 ‘옥석 가리기’에 나서면서 전체적인 투자금은 줄고 생성형 AI 및 IT 인프라 분야 등 성장 잠재력이 높은 일부 분야로 집중되는 양상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도 업계 최상단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막대한 투자금을 유치하면서 경쟁력을 더욱 고도화하고 있다. 기존 빅테크 기업들도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 기업과 적극적으로 힘을 합치고 있다.
오픈AI는 지난해 유치한 100억 달러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만 130억 달러(약 18조 원)를 조달했다. MS는 이를 통해 오픈AI 영리법인이 거둘 순이익 중 49%에 대한 지분을 확보했다. 두 회사의 파트너십은 생성형 AI 업계의 최대 협력 사례로 꼽힌다. 오픈AI는 최근 애플의 AI 비서 시리에 챗GPT-4o를 탑재하면서 빅테크 동맹을 더욱 확장했다.
오픈AI의 가장 유력한 대항마로 꼽히는 앤스로픽에 대한 구애도 상당하다. 2021년 설립된 앤스로픽은 아마존으로부터 40억 달러(약 5조 5000억 원), 구글로부터 20억 달러(약 2조 7000억 원)를 투자받았다. SK텔레콤 또한 앤스로픽에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투자한 바 있다. 일론 머스크가 지난해 7월 설립한 xAI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머니 등을 포함해 최근 60억 달러(약 8조 30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AI 스타트업 미스트랄이 삼성·엔비디아 등으로부터 6억 달러(약 9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는 등 설립 1년여 만에 10억 유로 이상의 투자금을 확보해 주목받았다.
AI 산업의 확장 속에서 글로벌 스타트업들 또한 인수합병(M&A) 등 생존을 위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빅데이터 처리 기업 데이터패브릭은 지난해 생성형 AI 스타트업인 모자이크ML을 13억 달러(약 1조 7000억 원)에 인수했다. 톰슨로이터는 법률 AI 비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케이스텍스트를 6억 5000만 달러에 사들이면서 몸집을 키웠다. MS는 자체 AI 개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0억 달러 이상을 들여 3월 인플렉션AI를 인수했고 엔비디아는 AI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쇼어라인을 사들였다.
이 같은 소수 빅테크 기업들 간 합종연횡은 독점 논란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 법무부와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최근 엔비디아·MS·오픈AI를 대상으로 반독점 조사에 착수했다.
◇메인에서 소외될라…‘몸집 키우기’ 나선 韓 기업들=AI 시장에서 거대 자본의 흐름 속에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다. AI 반도체 기업 등 일부 스타트업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수천억 원대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지만 전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면 미약한 수준이다. 국내 AI 반도체 대표 주자인 리벨리온이 누적 2770억 원, 퓨리오사AI가 누적 1610억 원, 사피온이 1400억 원, 딥엑스가 1100억 원 등의 투자를 유치했지만 조 단위의 유치 기업은 전무하다.
업계에서는 국내 기업들이 거대 투자금 유치 등을 통해 AI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몸집 키우기’가 필수라고 조언한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해외 선도 기업들과의 파트너십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글로벌 메인 AI 시장에서 이목을 끌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창한 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적인 금융투자자들과 결합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우리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미국에 가서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전격 합병을 발표한 사피온과 리벨리온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투자 자금이 경색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내 기업 간 합병이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파트너십 확보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SK텔레콤은 최근 앤스로픽에 이어 미국 AI 검색엔진 스타트업인 퍼플렉시티에 1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통신 특화 AI 개발을 위해 글로벌 통신사와 연합한 ‘텔코 AI 얼라이언스’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네이버는 인텔과 손잡고 엔비디아 진영의 대항마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반면 글로벌 빅테크 등과의 뚜렷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자체 개발에만 매달리고 있는 카카오는 상대적으로 경쟁력 확보에 부진한 상황이다.
다만 경쟁력 확보에 치중해 지나치게 빅테크와의 협업에만 의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해외 빅테크 입장에서는 한국은 작은 기업일 뿐이라 자칫 우리 기업들이 흡수당하고 마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며 “최소한 필수적인 요소들에 있어서는 자체적인 기술 개발 능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