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치료가 잘 끝났습니다. ”
25일 연세암병원 중입자치료센터 지하 4층. 김경환 세브란스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와 함께 조정실에서 치료 과정을 지켜보던 의료진들은 그제서야 한숨을 놓았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던 김모 씨(65·남)는 “(중입자치료를) 시작한지 몇 분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끝났다고 해서 놀랐다”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회전형 빔 치료실을 나섰다. 연세암병원이 도입한 회전형 치료기는 환자의 호흡에 따라 달라지는 종양 위치를 분석해 중입자를 조사한다. 전문용어로는 호흡동조치료라고 하는데 덕분에 방사선 조사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김씨는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종양이 발견돼 타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하던 환자다. 추적관찰을 하던 중 종양이 커졌는데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외과적 치료에 대한 부담이 컸다. 김씨는 중입자치료는 수술 없이도 암을 제거할 수 있고 후유증이 적다는 말에 세브란스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김씨는 국내에서 중입자치료를 받은 폐암 1호 환자가 됐다. 이날 첫 조사를 시작으로 총 4회에 걸쳐 중입자치료를 받게 된다.
중입자치료는 X선이나 감마선을 이용하는 기존 방사선치료와 달리 가속기(싱크트론)로 탄소 원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한 다음 고정형 또는 회전형 치료기를 통해 암세포에 에너지빔을 조사하는 방식이다. 빔이 인체를 통과할 때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암조직을 지나치는 순간 에너지 전달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소멸되는 ‘브래그 피그(Bragg Peak)’ 원리를 이용한다. 삼성서울병원, 국립암센터에서 시행 중인 양성자치료와 원리는 동일한데 이용하는 원자의 종류가 다르다. 생물학적 효과가 X선보다 2~3배 우수한 데도 암세포 이외 다른 정상 조직에 대한 영향은 적은 건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암 주변 정상조직에는 거의 손상을 가하지 않고 암세포만 정밀 타격할 수 있다. 환자 입장에서는 강력한 암치료 효과를 누리면서도 부작용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폐에는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 없다. 기침, 흉통, 객혈, 호흡곤란 등의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암이 진행되어 주위 조직을 침범했거나 전이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폐 조직 사이로 암세포 전이도 쉽다. 전체 폐암 환자의 60% 가량이 김씨와 달리 폐 전체에 암이 퍼진 4기에 첫 진단을 받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다.
연세의료원은 약 3000억 원을 투입해 중입자치료 설비와 최신 장비를 갖추며 국내에서 중입자치료 시대를 열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뾰족한 수가 없던 난치암 환자 중 일부는 중입자치료를 받으러 일본이나 독일로 원정을 갔다. 거금을 들여 출국했지만 현지 의료기관에서 치료 대상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낙심하는 사례도 있었다. 폐암 치료에는 지난달 가동을 시작한 회전형치료기가 적용된다. 회전형은 치료기가 360도 회전하기 때문에 암 발생 위치 등을 고려해 환자 맞춤 치료가 가능하다. 20년 넘게 중입자치료를 진행 중인 일본의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QST)가 주요 의학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3cm 이하의 초기 폐암은 3년 국소제어율이 95% 이상이었다. 더 큰 종양의 국소제어율도 80~90%에 달했다. 국소제어율은 치료받은 부위에서 암이 재발하지 않는 확률이다. 방사선치료의 대표적인 부작용인 방사선폐렴 발생률도 3% 이하에 그쳤다. 기존 방사선치료에서 최대 20%까지 보고된 것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다.
김 교수는 “정상 장기는 피하고 암세포에만 입자가 닿는 중입자치료의 특성상 폐기능이 낮아진 환자에게도 적용 가능하다”며 “간질성 폐질환을 동반한 폐암 환자 등 수술이 어려웠던 환자에게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인 치료법이 생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달 초 췌장암과 간암 3기 환자에게 중입자치료를 시작한 연세암병원은 이번 폐암에 이어 하반기 두경부암까지 치료 암종을 확대할 계획이다. 중입자치료는 아직까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1회 치료 비용은 약 6000만~7500만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