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자본시장법 특례 규정을 통해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를 추가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은 일반법인 상법 개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따르면 상법은 2010년 이후 15차례 개정에 그쳤으나 같은 기간 자본시장법은 69차례나 개정 시행됐다. 일반법인 상법 적용 대상이 광범위한 만큼 특별법으로 주권상장법인에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소관 부처인 법무부가 추상적인 규정이 될 수 있다며 상법 개정에 미온적인 입장이라 일종의 우회로를 찾은 셈이다.
그러나 자본시장법 특례를 통해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할 경우 자본시장에 미치는 충격은 상법 개정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상장사 부담이 커지면서 자발적 상장폐지에 나서는 기업이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업공개(IPO)도 크게 위축되면서 국내 자본시장 기능이 자칫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금융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코스닥 상장사는 지금도 사외이사를 구하기 힘든 실정인데 자본시장법 특례 등으로 상장사의 이사 의무가 확대되면 이사 후보자를 구할 수조차 없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입법 권한이 없는 금감원이 자본시장법 소관 부처인 금융위원회 등 정부 내 협의도 없이 중대 사안을 공론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많다. 상법 개정만 해도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인데 배임죄 폐지·축소 등 형법 개정에 이어 자본시장법 특례까지 쟁점만 늘리는 형국이다. 다만 금감원은 해당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한 적이 없고 다양한 방안을 놓고 고민 중인 단계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학계나 전문가들이 상장법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해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견이든 모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금감원은 자본시장법 특례까지 살펴볼 정도로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날도 이 원장은 경제단체들이 주최한 ‘기업 밸류업을 위한 지배구조 세미나’에 참석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적 원인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모순을 꼽았다. 상법 개정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주요 20개국(G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업 지배구조 원칙 등 글로벌 기준에 맞게 자본시장을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G20·OECD는 이사에게 회사와 주주에 대한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원장은 “주주 권리 행사가 보호·촉진되고 모든 주주가 합당한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기업지배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현행 법체계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소송 남발 가능성, 경영권 위협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날 세미나에서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회사법의 근간을 건드리면 큰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며 “국내 주식투자 인구가 1400만 명이 넘는데 이사가 모든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상징적 의미로 이사의 충실 의무 조항을 개정하더라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충실 의무 규정은 일반 규정이라 법원이 구체적 사안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며 “상법 개정이 구체적 상황별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인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 국내 경제단체 8곳은 이달 24일 상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공동 건의서를 발표하고 정부·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이날 정철 한경협 연구총괄대표는 “상법 개정이 장기적인 기업 발전을 저해하고 경영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며 “신속한 경영 판단이 어려워지고 이사회의 정상적인 의사 결정도 온갖 소송과 사법 리스크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고 호소했다.
한편 재계와 당국은 상속세 개편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상속세 제도는 높은 세율에 최대주주 할증 등 가업상속공제에 불합리한 요인 등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원장은 “왜곡된 상속세로 주가가 억눌려 있다는 문제의식에 이견이 없고 당국 내 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