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마켓, 중고, 빈티지, 구제, 당근마켓. 매일같이 에디터의 휴대폰 검색 기록을 차지하는 키워드들입니다. 수박 객원에디터는 사람의 손때가 약간 탄 물건들을 좋아합니다. 애지중지 다루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편안함, 그리고 중고 물품들은 가격도 싸니까 지갑도 지킬 수 있고 ‘내가 환경보호에 도움이 됐다’는 작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6일 풀무질X동물해방물결(이하 동해물)X비건클럽X미암미암 무려 네 곳이 함께 해방촌에서 ‘해방장’이라는 비건 플리마켓을 열었습니다. 읽고, 느끼고, 살리는 기부장터이면서도 신나게 먹고, 마시고, 득템하고, 이야기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랐습니다. 수박 객원에디터의 인생 첫 비건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어디를 먼저 갈까 고민하던 중 일단 허기를 채우기 위해 ‘미암미암’부터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땀을 흘리며 해방촌 언덕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던 중 식당인지 옷가게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정체불명의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목적지인 미암미암이었습니다. 가게 앞 테라스와 가게 내부에는 중고 옷과 소품들이 진열돼 있었습니다. 동네 특성상 길거리를 지나다니다가 우연히 방문하신 외국인 손님들이 많았는데 호쾌하게 웃으며 턱턱 사 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괜스레 좋아졌습니다.
미암미암에서 이번 해방장을 위해 비건 메뉴도 준비했습니다. 메뉴는 가지 아보카도 샌드위치, 두부 버섯 샐러드 두 종류입니다. 에디터는 가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이 샌드위치는 평소 미암미암에서 판매하는 비건 메뉴라고 합니다. 향긋한 올리브오일을 바른 통밀빵에 아보카도, 구운 가지, 썬드라이드 토마토를 올렸습니다. 누구보다 MSG와 자극적인 음식을 사랑하는 에디터지만 이런 음식을 먹으면 진정한 맛은 재료의 신선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음료 중에는 ‘알쓰’인 에디터가 이탈리아에서 마시고 반했던 아페롤 스피리츠가 있길래 냉큼 텀블러를 내밀었습니다. 해방장은 일회용품 없는, 텀블러와 다회용기가 필수품인 행사였습니다. 텀블러에 술을 담아 마셔보긴 처음이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보냉 기능 덕에 끝까지 시원하면서 묽어지지 않았습니다.
미암미암에서 배를 채우고 바로 책방 풀무질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독립서점 매니아로서 서울의 독립서점들은 꽤 많이 가봤지만 그 중에서도 풀무질은 비건과 환경에 관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주기적으로 동물권 읽기 모임도 한다고 하니 관심있으신 용사분들은 참고하시길!
책 말고도 구경거리가 정말 많았는데 유기농 면 속옷, 비건 마살라차이, 인도의 달콤한 간식인 베산라두까지 마치 편집숍에 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눈길이 가는 대로 아이쇼핑을 하던 중 어디선가 고소한 향이 코를 찔렀는데....그 정체는 바로바로 풀무질의 특별 메뉴, 핌 하우스 파이! 감자와 병아리콩을 주재료로 만든 비건 파이인데 깻잎페스토를 곁들인 메뉴입니다. 자칫 물릴 수 있는 퍽퍽한 감자를 깻잎 페스토가 향긋하게 잡아줍니다. 풀무질 사장님이 소속된 ‘양반들’이라는 밴드가 있는데 그중 멤버 두 명이 합심해서 개발한 비건 파이라고 합니다. 두 분은 원래 비거니즘에 관심이 없었는데 풀무질 사장님과 함께 지내면서 비거니즘에 스며들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책방 풀무질은 사장님의 철학에 따라 평소에도 논비건 음식은 일절 판매하지 않습니다.
비건 간편식 브랜드 VARO의 ‘마라 비빔 만두’도 이날의 인기 품목입니다. 간만에 ‘마라 수혈’을 할 생각에 얼른 다회용기를 사장님께 건넸습니다. 마라 소스를 뿌린 튀긴 만두에 채썬 양배추를 곁들여 주셨습니다. 매콤한 마라 소스에 혀가 얼얼해질 때쯤 양배추가 개운한 맛을 더해주는 환상의 조합입니다. 그동안 먹어 온 마라 소스와 100% 똑같은 맛이라서 마라소스가 원래 비건소스인가 싶었지만, 사장님께 여쭤보니 아니었습니다. 원래 마라소스에는 돼지기름인 라드가 들어가거든요.
논비건 제품과의 차이가 전혀 안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게 구현된 비건식이라니 놀라웠습니다. 현재 VARO는 사업 재정비 중이지만 곧 운영을 재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동해물과 비건클럽의 플리마켓입니다. 플리마켓 한켠에는 동해물과 비건클럽 부스에서 두 단체의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동해물은 종 차별 철폐와 동물 해방을 목표로 삼는 비영리단체입니다. 예를 들어 개 식용이 금지되기까지 다양한 캠페인, 잠입 조사 등의 활동으로 큰 힘을 보탰습니다.
비건클럽은 동해물에서 내부적으로 만든 온라인 비건 커뮤니티입니다. 비건인들끼리 정보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동해물과 비건클럽의 회원 분들이 운영하는 플리마켓은 느낌이 제각각이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 중 제 눈을 사로잡은 건 한 사진첩(세번째 사진). 비건클럽의 회원분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퀄리티가 남달라 여쭤보니 사진을 전공하셨다고 합니다. 사진마다 숨겨진 뒷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한 동해물 회원분의 마켓입니다. 태국에서 가져온 원단을 재활용한 티 코스터부터 미국여행을 하며 수집한 키링까지 주인장의 인생이 담긴 아이템들이 즐비했습니다. 이 마켓에서도 주인장이 비거니즘을 시작하게 된 사연과 함께 아이템에 숨겨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건의 형태는 아주 다양하단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각자가 지향하는 비거니즘을 존중해주는 분위기였고요. 완벽한 비건 1명보다 불완전한 비건 100명을 더 낫다는 말이 실감나는 자리였습니다. 전 세계의 온실가스 배출량 중 3분의 1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채식은 1인당 연간 탄소배출량을 2.1톤까지 줄일 수 있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어제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건강을 위해, 동물들을 위해, 아니면 그냥(?) 채식을 해보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 다시 한번 강조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