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진 때문에 항암치료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항암제 투여가 며칠 늦어진다고 해서 큰 일이 나진 않겠지만 암환자 입장에선 불안할 수 밖에 없죠. ”
서울아산병원에서 담도암 수술 후 경과를 관찰하던 중 전이 소견이 발견돼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천 모씨(79)는 “의정갈등이 하루빨리 해결돼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30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의료개혁에 관한 의료계의 한목소리를 내겠다며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를 출범한 지 열흘이 넘었지만 의정대화의 물꼬가 터지지 않으면서 환자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의료계 집단 휴진은 서울대병원 교수들의 ‘무기한 휴진’이 지난 21일 중단되고 대한의사협회(의협)도 임현택 회장이 언급했던 ‘무기한 휴진’ 계획을 보류하며 동력을 잃는 듯 보였다. 그런데 세브란스병원이 소속된 연대의대 교수들이 지난 27일부터 ‘무기한 휴진’에 돌입하며 상황이 반전됐다. 교수들의 자율에 맡겨 현장의 혼선이 크진 않으나 진료 및 수술·시술을 앞둔 환자들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소식이다. 서울아산병원이 소속된 울산의대 교수들 역시 다음 달 4일부터 1주일간 휴진을 계획하고 있다.
올특위는 지난 29일 두 번째 회의에서 전국의대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가 제안한 휴진 방안을 논의한 뒤 “다음달 26일 전 직역이 참여하는 '올바른 의료 정립을 위한 대토론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휴진을 결의한 것은 아니나 외래진료가 잡혀 있는 평일을 토론회 개최일로 지정했다는 점에서 집단 휴진이 불가피한 상황을 연출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당초 의료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그동안 의료계에 통일된 목소리를 내달라고 요구해 온 만큼 올특위 출범을 계기로 의정 대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양측은 지난 열흘간 의정간 대화체 구성 등을 위해 물밑대화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대화의 시작은 알리지 못하고 있다. 2월 20일 전후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대거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정 대치상태가 이어진지 넉달이 훌쩍 넘었다.
현재 벌어지는 의료대란의 핵심인 전공의들은 한결같이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올특위에는 전공의 몫으로 공동위원장과 위원 3명 자리가,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 몫 위원 1명 자리가 각각 마련돼 있지만 출범 열흘이 지나도록 공석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5일 수련병원들에 이달 말까지 전공의 복귀를 설득하고 미복귀자에 대해서는 사직처리를 해달라고 했으나 사직서 수리 시점을 두고 이견차를 좁히지 못하면서 복귀율도, 사직율도 시원치 않다. 복지부의 지난 26일 집계에 따르면 전국 211개 수련병원 전공의의 출근율은 7.7%에 그쳤다. 출근한 전공의는 전체 1만3756명 중 1065명뿐이다. 지난 3일 1013명에서 고작 52명 늘었다. 국립중앙의료원과 가톨릭의료원에서 각각 사직한 전공의 일부는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정부와 수련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부가 지난 2월 각 수련병원에 내린 전공의들의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이 위법하다고 보고 있다. 정부 명령에 따라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다른 병원에 취업할 수 있는 길이 막혀 그 기간 받을 수 있는 월급을 받지 못하는 등 재산상 손해를 입었다는 입장이다. 의협도 전공의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협은 그간의 오해를 풀겠다며 지난 28일 전공의와 의대생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었는데 참석자 수는 20명 안팎에 그쳤다. 전공의 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장기간 이탈과 수업거부 중인 전공의와 의대생이 올특위에 참여하지 않는 한 의정 만남이 성사되더라도 이들의 복귀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부는 다음 주 중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처분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달 중순까지 공고하게 돼 있는 하반기 인턴·레지던트 모집을 위해서는 이번 달 안에는 결원을 파악해 충원 인원을 정해야 한다.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처분을 정할 시점이 임박한 가운데 미복귀자에 대한 행정처분 등 강경책이 나올 경우 대화를 모색 중인 의정 관계가 다시 악화일로를 걷게 될까 고심이 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기자회견이나 성명으로만 의견을 밝혀 온 환자단체들은 마침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등 92개 환자단체는 다음 달 4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1000명이 참여하는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환자들의 거리 집회로는 전례 없이 많은 규모다. 이들 단체는 집회 계획을 알리며 “의료공백 정상화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해결을 위한 협의는커녕 환자의 불안과 피해를 도구 삼아 서로를 비난하기만 하는 갈등 양상에 환자단체들은 더는 인내하지 않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