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을 믿지 마라

오목 파고들어간 이용덕의 ‘역상조각’  
푹 패인 음각조각, 움직이는 착시현상
사진은 포착 못해 실물로만 감상 가능
토탈미술관에서 7월7일까지 전시

이용덕 '작업(working)111081' 혼합매체,110x170x12cm, 2011년 /사진제공=토탈미술관

분명, 움직였다. 낡은 신발을 집어 든 구둣방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옆으로 비켜섰더니, 슬쩍 그가 등을 돌린다. “이제 나 일해야 하니 그만 가 보슈”라고 말하듯. 다시 얼굴 앞으로 쫓아가니 잠시 내 쪽을 보는 듯하다가 이내 또 돌아선다. 움직이는 조각인가!


진짜 놀랄 일은 이제부터다. 노인의 근면했던 삶을 드러내는 우직한 팔이 궁금해 조금 가까이 다가섰다. 시야가 일렁이며 오히려 그의 팔은 더 멀어지고 만다. 패인 조각이다. 툭 튀어나온 힘줄이 가장 깊은 곳에, 팔은 몸통 안쪽으로 파고든 채 새겨진 음각(Negative)의 조각이다. 이용덕(65) 서울대 명예교수의 ‘역상 조각(Inverted Sculpture)’ 중 2011년작 ‘작업(Working)’이다.



이용덕 '웃음 055582', 혼합매체, 112×230×40cm, 2005년 /사진제공=토탈미술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 눈은 쉽게 속는다. 오죽했으면 프랑스어로 ‘눈 속임’을 뜻하는 트롱프 뢰유(Trompe l’œil·눈 속임 미술)가 장르 미술의 하나로 자리 잡았을까. 이용덕의 ‘역상 조각’은 눈이 깜빡 속아 넘어가는 ‘착시’를 이용하고 있다. 작품은, 사람이 안에 들어있다 쑥 빠져나간 양 푹 파인 형태다. 우리 눈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깊이만큼 더 튀어나온 것으로 인식한다. 비유하자면, 사랑의 기쁨에 비례해 이별과 부재의 아픔이 더 큰 것처럼!


이 작품은 관람객이 직접 바라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작가의 작업은 ‘표면’까지 만이다. 작품 앞에 선 관객의 두 눈이 이루는 시야각과 뇌의 공동작업을 통해, 표면 바로 위 공간에 형상이 떠오르며 감상이 시작된다. 신기하게도, 감상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작품 속 인물이 회전하듯 움직인다. 엄마 등에 업힌 아이가 길 너머를 보다가 내 쪽으로 눈을 돌리거나, 걸어가는 여인이 움직이는 나와 빤히 눈을 맞추기도 한다.



이용덕 '엄마 091185', 혼합매체, 110×85×12cm, 2024년 /사진제공=토탈미술관

■뒤집어진 실존…역상조각

이용덕은 1959년 서울 홍제동에서 태어나 그 동네에서 자랐다. 홍제천 가 진흙밭이 그의 놀이터였다. 말캉한 흙으로 군인이나 탱크를 만들며 해 질 녘까지 놀았다. 손재주가 좋았다. 그의 어릴 적 기억에서 ‘역상 조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사진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원판필름 위에 연필로 수정작업을 하던 모습이다. “필름 위에 연필로 그은 검은 자리가 인화된 사진에서는 하얗게 나타난다”던 말씀이 또렷하다. 사진의 색상 반전을 배운 셈이다.



이용덕 '공시성(Synchronicity)' 혼합매체, 각 235×105×30cm 4점, 2017년 /사진제공=토탈미술관

또 하나는 어머니가 손바느질로 만들어주신 신발 주머니. 열 살 즈음이었나, 네모난 가방에 손잡이가 달린 신발 주머니를 뒤집었다. 실밥 드러난 것을 제외하면 똑같은 모양이었다. 겉과 속, 안과 밖을 뒤집어도 그 형태가 같다는 깨달음이 훗날 ‘뒤집어진 실존(實存)’으로서 ‘역상 조각’의 시작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용덕은 1977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해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당시 최대 규모 공모전인 대한민국 미술대전(國展)에 출품해 1986년 조각 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가 촉망받는 작가이던 1980년대는 모더니즘 계열의 추상미술과 사회참여형 민중미술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화단을 양분하던 시절이다. 어릴 적부터 일관되게 ‘인체’에 관심 가져온 이용덕은 추상미술에 끼지 않았다. “대중과 같이 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기교를 버리고 좀 더 어눌하게” 표현하는 민중미술에도 동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함께 한 동인들이 1986년부터 매년 참가한 ‘현상전(現像展)’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막내 축에 속했던 이용덕은 마지막 ‘현상전’이 열리던 1991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과거의 순간을 현재의 시·공간으로 소환


이용덕의 '1995, Kl.k.7d.'의 모티브가 된 1920년의 사진. /사진제공=토탈미술관

베를린 예술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벼룩시장에서 1920년에 촬영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학급사진을 발견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아이들에게서 불안과 궁핍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될 아이들이었다.” 작가는 전쟁이 아이들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를 상상하며 실제 어린이 크기로 33명을 하나하나 빚었다. 꼬박 1년이 걸렸다. 먼 타국에서의 일이었지만, 내 아버지가 겪은 우리네 역사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에 담긴 과거의 시간, 지나간 기억과 장면을 소환했다. 부재(不在)의 빈 공간에 형상을 담고, 과거의 장면이 현재에 공존하는 ‘역상 조각’의 개념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작가는 이를 두고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적용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용덕의 '1995, Kl.k.7d.24.10.1920' 혼합매체, 65x55x150cm의 인물조각 33점 /사진제공=토탈미술관

작업 과정은 이렇다.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택한다. 찰나의 장면을 ‘반(半)입체’라 부르는 부조로 만든다. 이 때, 음각으로 새겼을 때 보일 모습을 머리 속으로 계산해 중심부가 패이고 가장자리가 퍼지는 비례와 왜곡까지 정교하게 반영한다. 제작 원리를 알더라도 아무나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다음 거푸집 같은 틀에 찍어 작품을 제작한다. 붓질로 채색도 더한다. 원색은 색 자체가 강렬해 착시 효과가 덜하기 때문에 은은한 파스텔톤을 주로 사용한다.


제25회 김세중조각상(2011)과 제15회 문신미술상(2016)을 수상한 이용덕은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교편을 잡았고 올해 3월 정년 퇴임했다. 전업작가로서의 첫 개인전이 종로구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7월7일까지 열린다. 요즘은 사진이나 SNS 이미지로 미술을 즐기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공들여 찍어도 사진은 이 작품을 담아내지 못한다. 반드시 현장에서 체험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예술은 경험이다. 체험하지 않는 예술은 오락에 불과하다. 온 몸으로 느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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