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시 중구 시청역 인근 교차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해 9명이 사망한 가운데, 가해 차량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 급발진 의심 신고 사례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를 법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밝혀지자 소비자들은 증거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페달 블랙박스’ 등 관련 장치들을 찾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일 서울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촬영해 운전자가 언제 어떤 페달을 밟았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영상 장비인 ‘페달 블랙박스’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 외국계 자동차 업체 관계자는 “최근 들어 급발진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그 증가세가 가파르지만, 급발진을 인정받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며 "이에 급발진의 직접 증거 요소가 될 수 있는 페달 블랙박스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 블랙박스 브랜드는 지난 4월 신규 급발진 대비 페달 블랙박스의 초도 물량 5000대가 온·오프라인 상에서 완판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비자들이 페달 블랙박스를 찾는 이유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차량 급발진과 관련한 법적 다툼에서 소비자가 제조사를 상대로 최종 승소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재판에서 운전자가 과실을 면제 받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송에서 재판부는 제조사의 손을 들어줬다. 1심에서 원고가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해도 항소심에서 뒤집히는 등 소비자가 급발진을 인정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일례로 지난 2020년 한 소비자가 A 씨의 차량과 같은 제네시스 G80 차량의 급발진으로 부상을 입었다며현대자동차를 상대로 2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8부는 현대차의 최종 승소 판결을 내렸다.
차량 급발진과 관련한 소송에서 소비자가 제조사를 상대로 승소하기 어려운 이유는 현행 제조물책임법상 소비자가 차량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 2는 ‘피해자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됐다는 사실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증명한 경우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소비자가 자동차 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할 때 사고 원인을 입증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자동차의 특성상 전문가가 아닌 일반 국민이 제조물의 결함을 규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감정을 요청한다 해도 결함 입증이 어려운 상황이다. 국과수는 차량 사고기록장치(EDR)를 감정해 급발진 여부를 판단하는데, 실제로 엔진을 구동하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계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
또한 EDR의 경우 제조사가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과수 입장에서도 제조사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체 관계자는 “제조사의 경우 전·후방 블랙박스인 ‘2채널’까지 설치를 하고, 4채널인 ‘어라운드뷰’ 기능까지 넣는 경우가 많지만 3채널인 패달 블랙박스는 소비자에게 권유하고 있지 않는다”라며 “EDR로 제조사의 과실을 입증하려 해도, 제조사가 EDR을 읽을 수 있는 모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가 유리해지기에는 어려운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국과수의 급발진 의심사고 감정 건수는 지난 2021년 56건에서 2022년 76건, 지난해에는 117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급발진이 인정된 사례는 없다.
정부 차원에서 이번 사고를 계기로 페달 블랙박스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일 오세훈 서울시장 또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사망 공무원의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한 뒤 “페달 오작동 및 오조작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공론화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공정거래위원회는 연구용역을 통해 운전자가 급발진을 입증하기 위해 차량에 관련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정무위에서도 “브레이크나 가속 페달 옆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기록장치를 부착하게 되면 사고 발생 원인 규명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한편,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3일 오후 11시 46분께 서울중앙지법은 경찰이 신청한 피의자에 대한 체포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출석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거나 체포의 필요성 단정이 어려움 등을 이유로 체포영장 신청을 기각한다’고 기각 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