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여 개국의 유권자 약 40억 명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2024 슈퍼 선거의 해’가 반환점을 돌았다. 상반기 진행된 주요 선거는 투표의 본질인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민심을 읽지 못한 집권 세력은 참패해 정권이 교체되거나 의회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변방에 머물렀던 비주류 세력이 시대의 선택을 받기도 했다. 기존 권력과 질서·정책을 쓸어버리고(SWEEP) 재편한 상반기 선거 빅뱅이 올 11월 전 세계의 관심사인 미국 대선으로 이어지며 더욱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전망된다. 요동치는 글로벌 정치 지형을 △정권 교체(Shift) △여성 리더십의 부상(Women) △극우 약진(Extreme Right) △나이 논란(Elderly ) △폴리코노미(Policonomy)의 키워드로 짚어봤다.
코로나 장기화·고물가 속 민생악화 등
현 정권 불만 누적 “투표로 심판·견제”
英 정권교체, 印·남아공 과반확보 실패
올해 선거에서는 ‘집권 세력’에 대한 심판과 견제가 두드러진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지속된 고물가·고금리로 인한 민생 악화가 현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4일(현지 시간) 치러진 영국 총선은 등 돌린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리시 수낵 총리의 조기 총선 승부수는 보수당에 ‘14년 만의 정권 교체’라는 참패를 안겼다.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노동당은 하원 의석 총수(650석)의 절반을 훌쩍 넘기며 압승을 거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코로나19, 지난 5년간 총리 넷을 갈아치운 정치적 혼란 및 추문 등을 언급하며 “얼룩진 10여 년을 이끈 보수당에 유권자들이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 5월 실시된 남아프리카공화국 총선에서는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당 대표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의회 전체 의석 400석 중 159석을 차지하며 1994년 첫 집권 이후 30년 만에 과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만연한 부패와 높은 실업률, 고질적인 전력난 등이 투표 결과로 이어졌다. 인도 역시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총선에서 3연임에 성공했지만 그가 이끄는 인도인민당(BJP)이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해 ‘반쪽 승리’에 그쳤다.
프랑스에서도 무게중심의 이동이 감지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프랑스 조기 총선 1차 투표에 이어 이달 7일로 예정된 2차 투표에서도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원내 다수당 등극이 유력한 상황이다. RN이 1당에 올라 총리를 배출하면 프랑스에서는 27년 만에 역대 네 번째 ‘동거 정부(대통령과 총리의 소속 당이 다른 행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셰인바움, 멕시코 첫 여성대통령
실용주의 앞세워 유럽서도 여풍
美 해리스, 바이든 대안 급부상
남성 중심의 ‘마초 문화’가 지배적인 멕시코에서 6월 200년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당선인은 무려 59.75%의 득표율로 2·3위 후보를 여유 있게 제치고 압승을 거뒀다. 과학자 출신 엘리트 정치인인 셰인바움은 2000년 환경부 장관을 지낸 후 2018년 여성 최초로 멕시코시티 시장에 오르는 등 존재감을 드러냈다. BBC 등 외신들은 “멕시코 정치는 셰인바움의 당선으로 분수령을 맞이했다”고 평가했다. 올 10월부터 6년의 임기를 시작하는 그는 극심한 폭력·마약 등을 근절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대통령과 집권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된 만큼 ‘전임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일이 당면 과제로 지목된다.
유럽에서는 ‘여성 리더십’이 기세를 떨치고 있다. 6월 유럽의회(EU) 선거에서는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이끄는 이탈리아형제들(FdI)이 1위를 차지하며 멜로니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졌다. 프랑스 국민연합(RN)의 실질적 리더로 꼽히는 마린 르펜 의원은 총선 승리가 확실시되며 2027년 프랑스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아이슬란드는 6월 기업가 출신인 할라 토마스토티르의 당선으로 28년 만에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을 맞았다. 아이슬란드 대선은 득표율 1~3위를 모두 여성 후보가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여성 리더들은 소속 정당의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생활밀착형 실용주의를 내세워 서민의 표심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고령 리스크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체할 후보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급부상하고 있다.
경제난에 난민·이민 혐오 커져
변방세력서 극우 잇단 ‘승전보’
EU 27개국 중 15개국서 득세
유럽 정치권의 변방이었던 극우 정당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급부상하고 있다. 주요 선거에서 승전보를 올리며 유럽연합(EU) 회원국(27개국) 중 절반이 넘는 15개국에서 극우 정당이 권력 중심부에 바짝 다가섰다. 이달 7일 치러지는 프랑스 조기 총선 2차 결선투표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의 제1당 등극이 유력하게 점쳐진다. 앞선 1차 투표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소속된 집권 여당 르네상스를 비롯한 범여권은 3위로 밀려났다. 영국 총선에서도 극우 세력이 약진했다. 극우 성향의 영국개혁당은 4석을 확보해 7전 8기 끝에 처음으로 원내 입성에 성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개혁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우군을 자처해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는 나이절 패라지가 이끌고 있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에서는 이달 2일 처음으로 극우 주도 연정이 출범했다. 또 스웨덴의 극우 스웨덴민주당은 의회 내 2당을 차지하고 있다. 벨기에(플레미시이익당), 오스트리아(자유당)에서는 극우 정당이 주요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어 집권 가능성이 커졌다. 에스토니아(에스토니아국민보수당), 라트비아(국민연합), 폴란드(법과정의당), 독일(독일을위한대안·AfD)에서도 극우 정당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 곳곳에서 극우 정당이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경제난과 이민 문제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자리하고 있다. 팍팍한 살림살이로 고통받는 가운데 난민과 이민에 대한 혐오가 커지고 이런 정서가 극우의 기반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울러 EU가 친환경 정책을 고집하면서 대규모 농민 트랙터 시위가 벌어지는 등 좌파의 전통적 정책에 대한 대중적 불만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美대선 ‘고령 리스크’ 최대 쟁점
佛 20대 총리 첫 탄생 가능성도
사상 최초로 전·현직 대통령이 맞붙는 11월 미국 대선에서는 ‘고령 리스크’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81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77세로 두 유력 후보의 나이가 모두 역대 최고령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진행된 대선 TV 토론에서 노쇠한 모습이 부각된 후 당 안팎에서 후보 교체 압박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쟁자였던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대사와 낸시 펠로시 전 민주당 하원의장을 헷갈리는가 하면 헝가리 등의 국가 명칭을 혼동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3월 5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71세로 대표적인 고령 지도자로 꼽힌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개헌을 통해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 이렇게 되면 푸틴 대통령의 나이는 84세로, 사실상 종신 집권 수순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유럽에서는 ‘젊은 정치인 바람’이 불고 있다. 조기 총선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사상 첫 20대 총리의 탄생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승기를 잡은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는 1995년생으로 올해 29세다. 바르델라 대표가 차기 총리에 오를 경우 가브리엘 아탈 현 총리(34세)의 최연소 기록도 깨진다. 바르델라 대표는 16세에 RN에 입당한 후 당 대변인 등 요직을 거쳐 27세의 나이로 당 대표에 추대됐다. 틱톡 팔로어만 170만 명이 넘는 그는 활발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을 통해 청년층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당 지지층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바르델라 대표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실질적인 권한과 영향력은 그를 키워낸 마린 르펜 의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트럼프發 인플레 우려에 시장 요동
유럽 불확실성에 ‘채권 발작’ 공포
세계 각지에서 정권이 뒤바뀌고 정치적 불안이 높아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특히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트럼프 2기’가 열릴 가능성은 채권·주식·외환시장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압승한 것으로 평가되는 TV 토론 이후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이달 초 연 4.462%까지 치솟은 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고율 관세와 대규모 감세 정책을 내세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전 세계 인플레이션이 다시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달러화 강세로 신흥국 통화의 평가절하도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들어 달러 대비 일본 엔화 가치는 162엔 선을 넘보며 12% 넘게 하락했고 한국 원화 가치도 7% 이상 떨어졌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유럽에서도 국채금리가 폭등할 경우 2012년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의 채권시장 발작이 재연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프랑스 조기 총선이 확정되고 극우의 득세가 예상되면서 주식·채권시장에서 대규모 이탈이 이어졌다. 프랑스 국채의 투자 위험성을 나타내는 프랑스·독일 10년물 금리 스프레드는 12년 만에 최대 폭으로 벌어지기도 했다. 지출 확대를 주장하는 극우가 정권을 잡을 경우 이미 극심한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더욱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금융시장의 혼란에 유럽중앙은행(ECB)이 ‘소방수’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프랑스발 국채 불안이 EU와 역외로 확장될 위험이 높다. 독일 등은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EU 기준을 초과한 점을 지적하며 ECB의 개입이 불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