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찾은 서울 종로구 종로5가 청계천 인근의 의류 상가. 이곳에는 작은 패션 도·소매점을 따라 당장이라도 짐을 싣고 달릴 준비가 된 오토바이 수십 대가 일렬로 서 있었다. 오토바이와 골목 사이사이로는 ‘사입삼촌(동대문 도매 물건 대행업자)’들이 옷과 부자재가 든 봉투를 들고 바삐 움직였다. 전국 각지로 의류와 부자재들이 뻗어 나가는 동대문. 이 일대에서 일어나는 연간 거래액만 15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동대문 길거리에는 봉투를 들고 바삐 오가는 하얀 머리의 시니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들이 들락날락하는 파란 간판의 한 상가, 이곳은 물류 일자리 플랫폼 스타트업이 전개하는 시니어 물류 배송 서비스 ‘어딜’의 동대문 거점이다. 라이프점프는 이곳에서 조승연(40) 조은앱 대표를 만나 그가 생각하는 건강하고 당당한 시니어 일자리란 무엇인지 들어봤다.
조 대표는 4년 전만 해도 베트남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현지에서 한국 음식이 인기를 끄는 점에 착안해 한강에 있는 편의점처럼 기계를 이용해 직접 라면을 끓여 먹는 ‘한강라면’ 식당 사업을 전개한 것. 하지만 코로나19로 여건이 어려워지자 2020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60대였던 그의 어머니는 퇴직 후 월 30만 원을 채 못 받는 공공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30만 원 벌며 고생하는 것보다 쉬는 게 낫지 않느냐”고 권유하자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냐, 감사해야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작은 일자리라도 감사하게 일하는 시니어, 한 달 30만 원이 채 안 되는 일자리마저도 치열하게 ‘쟁취’해내야 하는 시니어. 귀국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조 대표는 시니어의 시각으로 일자리를 보게 됐다. 준비에 들어간 그는 2021년 ‘조은앱’을 창업하고, 시니어 물류 배송 서비스 ‘어딜’을 출시했다. 어딜은 ‘어르신 딜리버리(배달)’과 ‘어반(도시) 딜리버리’의 뜻을 담고 있다. 지금의 동대문 거점은 2022년 8월 문을 열었다. 현재 하루 평균 5kg 미만 소화물 약 150개가 어딜에 소속된 60세 이상인 시니어 파트너들의 손을 거쳐 주인을 만난다.
수수료 20%로 낮추고, 배송 헤매지 않게 경로 탐색 앱 지원
보통 시니어 택배원들은 다음 배송이 있을 때까지 지하철 대합실이나 야외 등 길거리에서 무한 대기한다. 고객들이 동대문부터 강남까지 시니어 택배를 이용해 물품을 배송하는데 드는 비용은 대략 7000원선. 배송에 드는 시간은 왕복 1시간 30분 정도. 업체가 30~40%의 수수료를 덜고 나면 시니어 택배원의 손에는 4200~4900원이 돌아온다. 그렇게 버는 하루 수입이 2만~3만 원. 종사자들 사이에 ‘힘들지만 보수는 적은 일’이라는 인식이 나오는 이유다.
조 대표는 이러한 인식을 바꿔보려 수수료를 20%로 낮췄다고 한다. 수수료를 낮출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희는 배송을 알선해주는 업체를 쓰지 않아요. 상품을 직거래하는 것처럼 일종의 ‘유통단계’를 줄인 셈이죠.”
조 대표는 “타사에서 40%의 수수료를 떼고 월 24만 원을 받는 파트너가 있다면, 어딜에서는 같은 양의 일을 하고도 월 32만 원을 번다”며 “어딜 파트너들은 보통 하루 5건을 배송해 월 80만 원을 버는데 바삐 움직여 하루 7건을 배송하면 월 120만 원도 벌 수 있다. 1인 최소 노후 생활비가 약 124만 원이라고 하니 우리 일을 통해 경제적 자립과 사회활동도 할 수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배송하려면 몇 번씩 교통수단을 환승해야 할 때도 있다. 다양한 경로 가운데 어떤 경로가 시간이 덜 드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시니어 파트너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어딜은 파트너가 사용하는 앱에 관련 기능을 넣었다. “지도 앱을 보면 자동차와 도보일 때만 경유지를 추가할 수 있지요. 운전하다 길을 잘못 들면 내비게이션이 새로운 길을 추천해 주지만 대중교통은 그런 서비스가 없어요. 저희는 파트너들이 사용하는 어딜의 앱에는 대중교통 경유지 추가기능과 길을 잃었을 때 시시각각 새로운 길을 추천해주는 기능이 있어요.”
어딜은 시니어들이 이 일을 ‘당당하고 건강한 일자리’로 인식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소속 파트너에게 사원증을 제공하고, 이달의 우수 파트너도 선정한다.
“소속감의 반대말이 ‘박탈감’입니다. 이게 어르신들이 느끼는 감정이에요. 일자리가 없으면 사회에서 박탈당했다고 생각하세요. 물건을 배달하고 나서 그냥 퇴근하셔도 되는데 꼭 전화하셔서 ‘일 다 끝났다’고, ‘퇴근해도 되느냐’ 물으세요. ‘수고하셨다’고 한마디 해드리면 엄청 좋아하세요.”
어딜은 파트너들이 동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도 조성했다. 배송 거점이 일종의 커뮤니티 역할도 하는 셈이다. 이날도 거점에는 파트너 4, 5명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매장 앞 작은 배너말고는 파트너 모집·홍보를 해본 적이 없지만 어딜에 등록된 파트너는 560명까지 늘었다. 활동적으로 일하는 시니어는 약 70명이다.
어딜이 꿈꾸는 미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역 확장과 충무로, 강남 등 거점 확대도 준비 중이다. 2026년까지 19개의 거점을 만들고 한 거점당 300~400명의 어르신을 고용하는 것이 목표다. 시니어 배달원에 그만큼의 사회적 수요가 있을까.
“배달 주문 서비스 플랫폼은 ‘지금 배달하면 N만원 추가’라는 공지를 띄워 쉬는 배달원들을 일터로 유인하잖아요. 라스트 마일(상품이 고객에게 전달되기 전 마지막 단계) 배송은 항상 인력 부족이기 때문이지요. 그 틈을 시니어가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 서비스 재사용률이 89%에요. 배달원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물건이 도착지까지 사고 없이, 안전하게 가느냐가 중요한 거죠. 시니어가 청년보다는 느릴 수 있지만 안전과 성실로 보면 전혀 능력이 떨어지지 않아요.”
아들 집 가다가 1만 원 벌고, 마로니에 공원에 가다가 9000원 벌 수 있는 일
강서구에 사는 한동운(가명·58) 씨는 이 일을 하러 1시간을 달려 동대문 거점으로 출근한다.
“기본적으로 일이 쉽고 재밌어요. 일을 마치면 내게 주어진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하죠.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집에 있는 게 더 기운이 빠져요.”
한씨처럼 소일거리로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일. 아들 집에 가는 길에 1만 원 벌고, 마로니에 공원에 가다가 9000원 벌 수 있는 일. 조승연 대표가 만들고 싶은 일자리의 미래다.
“초고령화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건 시니어를 사회적 자원으로 안 보고 있다는 거죠. 저희는 시니어들이 사회의 큰 자원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시니어분들이 ‘나이 먹고 서럽다’란 말을 하시는데 ‘나이가 들고서도 할 일 많다’라고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보실 수 있게 돕고 싶어요. 이 일에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고, 경제적 자립도 가능하도록 어딜이 달려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