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의료기기 사업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최근 프랑스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을 인수하며 사업 재건을 위한 투자를 재개한 데 이어 수장 교체와 인재 영입에도 나섰다. 10여 년 전 신수종 사업으로 꼽혔지만 한동안 성장이 더뎠던 의료기기 사업에서 본격적인 ‘새판 짜기’에 돌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의 의료기기 자회사 삼성메디슨은 이달 초 필립스 출신인 비제이 샴다사니(Vijay Shamdasani) 상무(사진)를 인공지능 및 의료정보기술(AI and Informatics) 조직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필립스에서 17년 동안 의료기기 개발 경력을 쌓았고 적을 옮기기 직전까지 선행기술을 개발하는 조직을 이끌었다.
필립스에서 초음파 제품과 관련한 연구 조직(Global Ultrasound Research)을 이끌던 배언민 씨도 상무로 영입했다. 그는 이미징 연구개발(R&D) 조직을 총괄할 예정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 지멘스 등과 함께 의료기기 분야의 주요 경쟁사로 꼽히는 필립스에서 고위급 인사를 동반 영입한 것이다.
유규태 삼성메디슨 신임 대표가 5월에 수장으로 올라선 이후 AI 의료기기 사업 강화를 위한 인재 영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해석된다. 기존 초음파 기기 제품군에 AI를 접목해 의료기기 사업 영역과 고객 풀을 빠르게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의료기기 사업은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 시절인 2010년 바이오·자동차 배터리 등과 함께 5대 신수종사업 중 하나로 선정돼 집중 투자를 받았으나 인수 이후 10년 동안 세 차례 연간 적자를 기록하며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료기기 사업의 중심축에 AI가 도입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메디슨은 매출 5147억 원, 영업이익 864억 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2020년 15억 원의 영업 적자를 내는 등 부침을 겪었지만 2021년 흑자 전환에 성공한 이후 영업이익 규모를 꾸준히 늘려나가고 있다.
의료기기 사업을 다시 한 번 성장 궤도에 올리기 위한 삼성의 기반 작업도 속도를 높여가는 모양새다. 수장 교체 인사가 이뤄지기 직전 삼성메디슨은 초음파용 AI 진단기술을 보유한 프랑스 스타트업 소니오의 지분 전량을 1265억 원에 인수했다. 2011년 메디슨이 삼성전자 계열사로 편입된 이후 첫 인수합병(M&A)이다. 지난해 영업이익보다 많은 자금을 투자해 AI 의료기기 기술 투자에 나선 것이다.
소니오가 보유한 AI 진단 기술을 삼성메디슨의 초음파 의료기기 제품에 입히면 진단 시간을 단축하는 동시에 정확도는 대폭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수를 통해 유럽의 AI 개발 인력도 대거 확보할 수 있다. 삼성메디슨은 지난해부터 인텔과 협업해 AI 중앙처리장치(CPU)인 ‘인텔 코어 울트라’를 초음파 기기에 탑재하는 등 전략적 파트너십 범위도 넓혀가고 있다.
앞서 지난 수시인사에서 김용관 전 대표(부사장)가 사업지원TF로 이동한 것도 삼성메디슨의 그룹 내 존재감 확대와 연관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 부사장이 사업지원TF에서 반도체담당으로 배치되긴 했다. 하지만 의료기기 사업 전반을 이해하고 있는 고위 인사가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곳에 포함된 것 자체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분석이다.
삼성의 의료기기 사업의 새판짜기가 성공하면 삼성메디슨은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 등 바이오 계열사와 함께 신수종 사업의 양대 축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장조사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AI 의료 시장 규모는 2021년 110억 달러에서 2030년 1880억 달러(약 259조 7784억 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