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나혜석의 ‘경희(1918년)’ 중에서)
여성 문학의 100년을 훑는 7권 분량의 ‘한국 여성문학 선집(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민음사 펴냄)’이 출간됐다. 시, 소설, 희곡 등 장르화된 문학을 넘어 편지, 독자 투고, 선언문, 잡지 창간사 등 공적 글쓰기를 포함해 여성 문학의 저변을 확대한 것이 특징이다.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를 쓴 익명의 김 소사, 이 소사부터 1990년대의 하성란, 한강 소설가까지 포함됐다.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진행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선집 출간을 이끈 김양선 한림대 교수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거나 유동하고 있는 가운데 고정된 것을 깨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회고록, 일기, 항의문 등 글쓰기의 주체인 여성이 공적 담론에서 발언하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가 됐다”고 말했다.
여성 문학의 태동 시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인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이 발표된 1898년으로 삼았다. 여성도 정치 참여는 물론 직업을 갖고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자 6인이 저마다 시대를 정해 작품을 읽으면서 여성의 시각에서 당대 사회의 중심 질서와 경합을 벌이거나 문제의식을 던진 작품이 있다면 이를 새롭게 대표작으로 삼기도 했다. 박화성(1904~1988년) 소설가의 경우 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 ‘하수도공사(1932)’가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집에는 여성 노동자인 주인공을 내세워 성적 차별을 겪는 현실을 다룬 ‘추석 전야(1925)’를 대표작으로 선정, 수록했다.
군소 작가로 취급됐던 작가들의 재발견도 이뤄졌다. 해방 전후 시대를 다룬 김은하 경희대 교수는 “기존 문학사에서는 한국 전쟁 때 우리나라로 온 박순녀, 이정호 등 월남 작가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며 “박순녀 작가의 경우 이방인, 난민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그려낸 게 남달랐고 이정호 작가는 사상을 넘어 한국 전쟁 때의 성폭력, 남성적 야만주의에 대해 다루는 게 문단에서 중요하다고 봤다”고 전했다.
이들은 ‘여류작가’ ‘규수작가’로 통칭돼 평가 절하됐던 여성 작가들이 주류로 자리 잡은 시기를 90년대로 봤다. 이명호 경희대 영미문화 교수는 “영미 문학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 여성문학이 소수자 위치를 벗어났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90년대였다”며 “앞으로 여성들의 자기 표현이라든지 자기 글쓰기 형태가 폭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미국, 유럽 등에 비해 회고록 등 논픽션 문화가 약하지만 장르 구획을 넘어서는 여성들의 자기 서사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쏟아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번 선집 출간은 2012년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출범한 지 12년 만에 낸 성과다. 작업에는 국문학 연구자 김양선, 김은하, 이선옥씨,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 이희원씨와 더불어 시 연구자인 이경수씨가 참여했다. 김양선 교수는 “7권의 선집을 좀 더 압축해 1~2권 분량으로 내놓는 작업을 통해 또 한 번 점검을 거칠 것”이라며 “제대로 된 여성 문학사를 써보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출간 전부터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7권 분량으로 세트 가격은 10만4000원이지만 의미있는 작업에 출간 전 북펀딩에서 295명이 참여했다.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는 “예상했던 것의 두 배 이상의 반응이었다”며 “최근 몇 년 새 역주행을 통해 오랫동안 사랑 받는 양귀자 소설가의 ‘모순’처럼 오래된 신작이 이 선집 안에서 발굴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