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당시 받았던 재판이 절차적 정의를 철저히 무시한 채 진행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 전 부장 유족 측이 청구한 재심 개시 여부는 이르면 오는 8월 결정될 예정이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이재권 송미경 김슬기)는 12일 오후 3시 김 전 부장의 내란목적 살인 등에 대한 재심청구 사건의 개시 여부를 위한 세 번째 심문기일을 열었다.
이날 심문기일에는 1979년 12월 1심 군법회의에서 김 전 부장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84) 변호사가 지난 기일에 이어 증인으로 출석했다. 안 변호사는 “김 전 부장 피고인의 변호를 7명이 했는데 이제 저만 생존해 있다”며 “유일한 증인이 돼 이 자리에 섰다는 점이 감개가 깊다”고 했다.
이어 그는 “제가 막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당시 군법회의는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며 “당시 과연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돼 재판했는지 참으로 통탄해 마지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변호사는 지난달 심문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당시 법무사(지금의 군판사)는 재판 경험이 없는 대령이었는데, 다른 방에 있는 판사와 검사들이 스피커를 통해 재판 과정을 듣고서는 쪽지로 진행을 지시했다”고 재차 증언하며 “권력이 쥐여 준 시간표에 따라 재판이 진행됐다. 절차적 정의가 철저히 무시됐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오욕의 역사이며 참으로 치가 떨리고 뼈 아픈 경험이었다”며 “지성인과 지식인, 공직자가 자기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면 이같이 절차적 정의가 무너지고 신군부(전두환 정부)가 집권하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날 재판정에서는 1979년 12월 1심 군법회의에서 김 전 부장이 한 최후 진술 녹음 일부가 재생되기도 했다.
녹음에는 “더 이상 국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모순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그 원천을 두드린 것”이라며 범행 이유를 설명하는 김 전 부장의 음성이 담겼다. 녹음 속 그는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이 나라가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달 말까지 양 측(검찰·변호인)의 추가 자료를 받고 이르면 8월 재심 개시 여부를 결론내릴 방침이다.
이 재판은 유족 측이 40년 만에 재심을 청구한 지 4년 만에 진행되고 있다. ‘김재규’라는 인물과 10·26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