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푸·월마트, 국내 진출…경제 실핏줄 붕괴 우려.’
1996년 경제지의 제목들이다. 당시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계기로 한국 유통시장이 개방되자 여러 선진국의 대형마트들이 앞다퉈 진출했다. 우리 소비자들은 동네가 아닌 대형창고에서 쇼핑카트를 경험했고 싼 가격의 물품을 박스째로 사다 날랐다. 백화점이나 동네마트·전통시장은 고사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하지만 10년 후 성적표는 예상을 빗나갔다. 까르푸는 10년 만에, 월마트는 9년 만에 한국 시장에서 각각 손을 뗐다. 한국 대형마트는 우리 실정에 맞는 바이어들을 키웠고 체형에 맞는 매대 등 아기자기한 쇼핑 분위기를 연출해 외국 마트에 ‘한판승’을 거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중국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공세가 시작됐다. 이들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습득한 다양한 상품 구성과 제로 물류비의 가격경쟁력 등을 앞세워 전 세계를 공략하고 있다. 전 세계 각국은 정보 유출 문제 등을 지적하며 자국 시장 보호에 나섰다. 한국도 정부와 국회 등이 알테쉬 공세에 머리를 맞대고 있어 정책적 방향성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규제는 사라져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1997년에 제정된 유통산업발전법이다. 이 법은 유통 개방 당시 유통구조를 선진화하고 효율화한다는 취지의 법이다. 그러나 2010년부터 한국 마트들의 출점 규제와 월2회 의무 휴업 등 갈라파고스형 규제가 포함됐다. 대형마트가 문을 닫았다고 전통시장을 가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이미 유통의 중심축이 온라인으로 넘어간 만큼 현실을 반영한 법 개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둘째는 아마존·알리바바와 같은 글로벌 유통 플랫폼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시장에서 영세 상인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지구촌에서 K플랫폼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검은 반도체’로 불리는 김의 수출은 연 20% 이상 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의 떡볶이와 김밥 먹방을 따라하는 숏폼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다. 국내 e커머스 업체들을 미래 수출의 파이프라인으로 키워나가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데이터의 표준화도 중요하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상품 정보는 학습과 분석의 기본이다. 세계 최대 쇼핑몰 아마존은 이미 수천만 개의 상품 정보를 표준화해 검색과 추천 시스템의 정확도를 높였다. 원하는 물품의 여러 가격을 한눈에 비교해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도 온라인 유통사와 함께 상품 정보 표준화를 위한 공동 사업을 시작했다. 국제 표준 바코드를 통해 글로벌 수준의 상품 관리 체계를 갖추면 우리 유통기업도 세계가 믿을 수 있는 제품을 팔 수 있을 것이다.
남대문 앞 대한상의 건물 로비에 들어서면 보부상을 주제로 한 조각상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하루 10㎞ 이상 거리를 봇짐을 지고 다닌 대한민국 유통의 시초다. 그 후손들은 화신백화점(1931년)과 한남슈퍼(1970년)를, 창동 대형마트(1993년)와 온라인 쇼핑몰(1996년)을 만들며 내수경제를 떠받쳤다. 알테쉬 공세가 지구촌 소비시장을 뒤덮고 있는 2024년, 정부와 기업·민간단체가 함께 힘을 모았던 그 시절의 지혜를 다시 발휘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