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3 학생인데 아직도 수능 날짜와 시험 범위가 안 나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윗분들, 아니 부모님들은 이 과목 하지 말자고 하시고 시민사회에서는 더 열심히 하라고 하고. 투자자인 대학교는 공부 잘하는 학생 뽑겠다고 하는데 수능 범위가 안 나와 있으니까 누가 공부를 잘 하는지 모르는 상태고요. 공부 열심히 하라고만 하지 말고, 얼마나 언제까지 어떻게 공부해야 되는지 좀 알고 싶습니다."
22일 한 대기업 공시 담당자의 발언에 엄숙했던 국회 토론장이 웃음과 박수로 들썩였습니다. 지난 4월 한국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이하 KSSB) 주도로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의 초안이 공개됐지만, 앞으로 수정을 거쳐 만들어질 최종안이 언제 발표될지 전혀 몰라 답답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공시 도입은 이제 시간 문제인 만큼, 빨리 확정된 안이 나와야 기업들도 마음 놓고 사업에 전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날 '국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기후공시 방향 제안' 토론회는 어렵지만 지구용사님들이라면 꼭 알아둬야 할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길어도 최대한 옮겨봅니다. 참고로 지속가능성 공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로도 불리는 광범위한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환경 부분을 떼어내서 기후 공시를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기후공시는 요약하자면 기업들이 얼마나 기후위기에 대처하고 있는지를 주주와 투자자와 시민사회에 샅샅이 아뢰어라, 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판매량이라든가 매출·이익·부채 같은 것만 정기적으로 공시하면 됐었는데 앞으로는 탄소배출량, 기후위기로 인한 리스크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도 의무적으로 공시하라는 겁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만큼 기업들이 바뀌지 않으면 지구의 미래도 없다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빠르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미 유럽, 미국, 싱가포르, 캐나다 등이 기후공시 의무화 시기를 2025~2027년으로 확정해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도 뭐라도 수출하려면 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기업도 기후공시 자체에는 이의가 없는 상황. 하지만 구체적으로 짚고 들어가면 이런 이슈들이 있습니다.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것 아닐까?"
기후변화 공동 대응을 위한 아시아 70여개 연기금들의 협의체인 아시아 기후변화 투자자그룹(AIGCC)의 배희은 이사님은 "기업 경쟁력 관점, 투자 관점에서는 오히려 기후 공시를 앞당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해외 투자자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한국 기업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기후 공시를 제대로 하는 기업들이 투자도 받기 편하단 이야기입니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님은 "어떤 기업이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투자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 아니냐?"면서 포스코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2022년 태풍 힌남노 때문에 공장이 침수되면서 가동이 중단돼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참고로 공장 침수 때문만은 아니지만,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포스코의 외국인 지분율은 절반으로 줄었고 특히 유럽 기관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했습니다. 탄소다배출 회사인데도 탄소감축 목표가 뚜렷하지 않아서입니다.
이동섭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수탁자책임실 실장님도 토론회에 참석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국민연금 같은 투자자 입장에서 봤을 때 "투자 대상 기업의 기업가치 향상을 위해 재무적 요소뿐만 아니라 비재무적인 요소까지 보는 것이 국민연금의 투자 방향"이고 "기후 공시 도입은 가장 빠를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연금은 이미 자체적으로 기업들의 기후 리스크 관리 수준을 평가해서 투자에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후공시는 일차적으로 자산 2조원 이상의 국내 상장사들에 적용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해당되는 기업의 66%(2021년 기준)는 이미 '지속가능경영보고서'란 걸 통해 기후공시 비슷한 정보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글로벌 시장에선 이미 기후공시가 대세라는 분위기이고, 미리미리 만들어둬야 기후공시가 정말 의무화됐을 때 제대로 공시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국내 6위 자산운용사인 NH아문디에서 ESG 리서치를 맡고 계신 최용환 자산운용팀장님은 기후공시 전과 후는 아주 다를 거라고, 그래서 굉장히 반갑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기후 관련한 기업 평가는 3년 전 배출량 추이라든가 해외사업장이 포함 안 된 자료 정도였고 탄소감축 목표도 모호합니다. 하지만 기후공시 이후로는 글로벌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TCFD를 기반으로 더 구체적인 숫자와 목표와 수행방안이 공개될 전망입니다. 결과적으로 "잘 하는 기업들은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기업 입장에서는 자본조달비용 감소 등 인센티브가 된다"는 겁니다. ESG 펀드 매니저 분들도 업무가 좀 수월해지겠죠. 최 팀장님은 소비자, 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들, 특히 탄소배출량은 많은데 상장이 안 돼 있어서 기후공시 의무화 요건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의 기업들'이 기후변화 리스크가 높다면서 주의가 필요하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자율적으로 공시하면 안 될까?"
공시는 자율 공시인 '거래소 공시'와 의무 공시인 '법정 공시'로 나뉩니다. 변호사이기도 한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님은 "거래소 공시는 기업에 유리한 정보만 공개할 가능성이 있고 그린워싱의 여지가 있다"며 "거래소 공시도 거래소의 제재를 받긴 하지만 행정·형사 처벌 규제가 가능한 법정 공시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글로벌 흐름 역시 법정 공시라고 합니다. 이동섭 국민연금 실장님도 법정 공시에 한 표를 던졌습니다. "강력하게, 누구든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것이 투자자 입장에서는 좋다"면서요. 다만 기업 규모와 사업 현황에 따라 일부 차등 적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덧붙였습니다.
최용환 NH아문디자산운용 팀장님도 “비상장 기업도 재무공시는 하듯, 지속가능 공시 역시 재무 공시와 같은 수준(=법정 공시로)을 목표로 해야 한다”면서 “법제화 과정에서 중소·중견 ·비상장 기업까지 낙수효과를 기대하면서 추진하는 것과 처음부터 중소·중견 ·비상장 기업에 대한 적용까지 목표로 삼아 추진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스코프 3, 포함해야 할까?"
이제 지구용사님이라면 스코프 1~3에 대해 아시겠지만 그래도 정리하면 스코프 1은 기업이 직접 배출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스코프 2는 기업 활동에서 사용된 전력까지 계산한(석탄 전기인지 태양광 전기인지 등) 배출량, 스코프 3는 협력사의 탄소배출량까지 계산한 배출량입니다. 다만 스코프 3는 아직까지 제대로 표준화된 계산법이 없어서, 기후공시 의무화를 확정한 해외 국가에서도 '첫 해에는 면제(일본)', '750인 이하 기업은 첫 해 면제(유럽)' 등 완화 규정을 둔 상태입니다. 이날 토론자들 모두 '처음부터 완벽한 스코프3 공시는 못 하겠지만 기업 간의 비교가 가능해진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지윤 그린피스 전문위원님은 "스코프 3를 의무화하지 않는다면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들이 협력사(기후공시 의무가 없는)로 배출 시설을 이전해서 공시 배출량을 축소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금융기관의 경우 '투자 기업의 배출량=금융기관의 배출량'인 셈인데, 금융사들의 배출량을 산정하기 위해서라도 스코프 3 의무화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금융사들이 탄소저배출 기업들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지구를 살리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이동섭 국민연금 실장님도 스코프3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투자 대상 기업의 제품 생산, 에너지 사용에 따른 탄소배출량뿐만 아니라 전후방 가치사슬 전반에서 어떤 위험이 있고 기회가 있는지 당연히 투자자들이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속가능성 공시 초안을 만든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이웅희 부위원장님도 토론자로 참석했는데요. 토론회 내내 '왜 빨리 안하는가?' '왜 더 구체적으로 못 만드는가?' 같은 원성을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나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업들이 현실적으로 기후공시에 필요한 정보를 준비할 수 있는지, 준비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를 모르고 강요하면 오히려 기후공시의 실효성이 없어진다"고요. 그래서 몇몇 조항은 의무화가 아닌 선택조항으로 초안에 담았지만 "선택조항은 유용하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한 사항이고, 잘 준비한 기업들은 선택조항까지 공시해서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위원장님은 "보통 회계 기준을 만들 때 기업들 의견 3,4개 정도 접수되는데 지속가능성 공시는 의견수렴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도 130개가 접수됐다"고 하셨습니다. 의견수렴기간이 끝날 때(8월)까지 200개를 돌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회계기준 수립과 지속가능 공시 기준 수립은 성격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회계는 법이 있고 제도가 있지만 지속가능성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거든요. 또 회계기준은 거래를 바탕으로 (비교적) 손쉽게 취합되는 정보지만 지속가능성 공시는 기후·생물다양성·인권·인적자본 등을 수치화·지표화해서 보여줘야 하다 보니까 정말 힘든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고생해서 초안을 만든 덕분에 기업들 사이에서도 "이전의 지속가능성 공시는 소설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공시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 같다"는 반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토론회에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들 남겨두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가 정말 필요하다고, 빨리 하자고 하는 상황에서 순조롭게 도입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웅희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부위원장 : 대한상공회의소의 설문 조사를 보면 응답 기업들의 76%는 2026~2028년에 기후공시를 도입해야 한다고 답함. 일반적인 규제 도입 시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도입 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뜻). 다만 인프라나 정책 지원, 준비 등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부도 글로벌 압박 vs. 도입시의 이익 모두 인지하고 준비 중.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 애플은 2014년경 이미 RE100을 선언, ‘한 기업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증명하겠다 했다. 주주들은 RE100을 ‘비용’으로 받아들이던 시기. 애플은 모든 생산품에 대해 재사용, 재활용 비율을 공개하고 있고 이 비율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음. 애플의 최대 경쟁력은 ‘지구를 지키는 기업이란 이미지’가 됐다. 한국도 그렇게 가려면 정부가 훨씬 빠른 속도로 기후위기 맞서서 한국 기업들이 기후공시 등 통해서 경쟁력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 : 기후공시 준비하면서 중소·중견기업 담당자들 나보면 ‘여기에 돈을 쓸지 말지’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 기후공시 의무화 시기 미정을 ‘당장 돈 들일 필요 없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의무화 시점 찍어줘야 기업들도 움직일 수 있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 : 앞으로의 자본주의는 ESG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살아남으려면 ESG 안할 수 없다. 저도 여야 합해서 ESG 포럼 만들려고 구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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